술은 인간관계에 있어 윤활유요, 사람들 간 마음을 열어주는 훌륭한 매개체다. 그럼 술만 있어 즐거울까. 술자리에 재미를 더하고 모두를 하나로 엮어주는 것이 바로 건배사다. 주선자나 술 제조자가 뭔가 의미를 담아 '위하여'를 한번 잘 외치면 유쾌한 웃음이 터지기도 하고, 참석한 사람들에게 심기일전하자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물론 자신의 주량에 걸맞은 적당한 양이 필수적이다.
밋밋하고 재미없는 술자리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터. 그래서 건배사나 폭탄사를 때와 장소에 잘 맞게 준비하면 서로 마음이 트인다. 술자리의 분위기 상승 촉매제랄 수 있다.
특히 건배사는 그 시대를 관통하는 의미가 부여되는 경우도 많다. 그 시대가 처한 상황이나 세태풍자가 없을 수 없다. 그래서 정권이 바뀌면 건배사도 바뀐다. 경제상황에 따라 바뀌기도 한다. 재미있는, 세태를 반영한 건배·폭탄사의 세계로 빠져보자.
◆톡!톡! 튀는 건배사
대구의 한 기업체 단합모임에서 한 임원이 이렇게 외쳤다. '성행위를 위하여'. 다들 썰렁했다. '뭐여! 갑자기 웬 뜬금없는 소리?' 다들 술렁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자 이내 다들 무르팍을 탁 치며 한바탕 웃을 수 있었다. 이 임원은 '성공과 행복과 위기극복을 위하여'라는 설명을 곁들였다. 지금 어려운 경제상황과도 딱 맞아떨어지는 건배사라 할 수 있다.
서상기 한나라당 대구시당 위원장은 지난 2월 대구·경북 보좌진들의 모임에서 건배사로 '여권 신장'을 외쳤다. 서 위원장은 "나를 낳아준 어머니를 비롯해 집에서는 아내와 딸, 밖에서는 여성 직장동료가 잘 되어야 한다"고 설명한 뒤, "이뿐 아니라 10년 만에 권력을 잡은 한나라당이 지리멸렬해선 안 되고 여권(與權)이 더 신장돼야 한다"고 또 하나의 의미를 부여했다.
'원더걸스'도 튀는 건배사. 그 뜻은 '원하는 만큼 더도 말고 걸러서 스스로 마시자'는 것. 웰빙을 추구하며 술을 강요하는 문화를 싫어하는 젊은 직장인들의 생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술을 적당히 마시려는 분위기를 담은 또다른 건배사로 '초가집'이 있다. '초지일관, 가자, 집으로'의 줄임말이다. 술자리를 짧게 하고, 일찍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의지'를 담은 것.
직장인들의 심정을 담은 '당신멋져'도 종종 등장한다. '당당하게 신나게 멋지게 져주며 살자'는 말로 아등바등 경쟁하는 현대 직장인들의 모습에 다소 여유를 주는 건배사로 잘 활용되고 있다. 이 모든 게 아내의 내조 덕분이라는 '내자의 덕'에서 '의'자를 한자로 바꾼 것도 음담패설 같지만 편한 분위기에서는 큰 웃음을 줄 수 있는 건배사.
◆시대에 따라 변하는 건배사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정부 부처나 청와대 관계자들의 건배사는 어떨까. 의외로 간단하다. 누군가 '저탄소'를 선창하면 자동적으로 '녹색성장'이 뒤따른다. 또 누군가가 '4대 강'을 외치면 '살리자'가 후창으로 따라붙는다.
경상북도는 김관용 도지사의 캐치프레이즈인 '일자리' '맹글자'를 주요 건배사로 자주 인용하고 있다. 대구시는 언제부터인가 '위하여'란 말을 대신해 '위하구(대구)'를 사용하고 있다. 대구·경북지역 공무원들이 지역 출신 인사들과 함께 모일 때는 '우리가'하면 '남이가'로 화답하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독특한 구호를 좋아한다. 최 위원장은 술자리에서 술잔을 높이 들고 '이대로'라고 선창하면 나머지 사람들이 '나가자'라고 후창을 하게 해 '그만큼 대통령의 뜻을 잘 따르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지난 참여정부에서는 주요 건배사 화두가 '혁신, 개혁'이었다. 또 일각에서는 '권위주의'를 외치면, '타파하자'는 후창이 뒤따르기도 했다.
김대중 정권에서는 'IMF'를 외치면 '극복하자'는 멘트가 정권초기에는 계속됐다. 또 일본이 독도 영유권 문제로 도발을 해올 때는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구호도 술자리에 자주 등장했다.
박정희 정권 때도 새마을 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잘 묵고' 하면, '잘 살자'로 되받아 흥을 돋웠다. 이 구호는 경제가 어려워진 지금도 간간이 술자리에서 들을 수 있는 건배사다.
심리상담사인 전종국 카운피아 연수원장은 "건배·폭탄사는 그 시대의 정서를 반영하는 말들이 녹아있다"며 "또 술자리마다 그때 그때 맞는 분위기를 살려주고 서로의 마음을 터놓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고 밝혔다.
◆그때 그때 달라요. '순발력'
주호영 한나라당 원내 수석부대표는 폭탄사는 순발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주 의원은 "동문들이 모일 때는 '앞에서' 하면 '끌어주고'를 외치고, '뒤에서'를 선창하면 모두가 '밀어주자'를 따라하게 한다"고 말했다.
요즘 유행하는 광고카피처럼 이상한 말도 분위기를 높이는 데는 제격이다. '비비디바비디 부'(SK광고-생각대로T), '하쿠나마타타'(만화-라이언 킹), '꿍따리샤바라'(클론의 노래), '카르페 디엠'(라틴어-현재를 즐기자), '메아 쿨파'(라틴어-내 탓이오) 등도 싱겁지만, 의외로 중독성 있는 건배사가 될 수 있다.
건배사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은 아무래도 '위하여'. 여러가지 형태로 변형된다. 고려대 동문들은 '위하고', 연세대 동문들은 '위하세'를 외친다. 각기 속한 단체명의 앞자를 따서 '위하' 다음에 붙인다면 곧바로 건배사가 된다.
지난해 7월 한 헤드헌팅 기업이 건배사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는데, 40대의 경우 '나가자'(나라를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자신을 위하여)가 1위로 뽑혔다. 20대에서는 '개나리'가 압도적인 1위로 꼽혔다. '개나리'는 '계(개)급장 떼고, 나이는 잊고, 릴랙스(relax)하자'는 뜻으로, 술자리에서만큼은 상하관계에 얽매이지 말고 편안하게 즐기자는 의미가 담겨있다.
◆오해받을 건배사는 피하자
정치권에서는 계파별 모임이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파당적 성격이 강한 건배사들이 있을 수 있다. 지난해 한 친박(친박근혜) 의원은 모임에서 '우리는'을 선창으로, '친근해'를 후창으로 했다 친이 의원들의 눈총을 받았다.
김태환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해 의원총회에서 '앞박 뒷박' 얘기를 하기도 했다. 이명박(대통령)·박근혜(전 한나라당 대표)의 이름에서 앞박이 이번에 대통령이 됐으니 다음번엔 뒷박인 박 전 대표가 대통령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취지의 농담조 발언이었다. 정치권의 논쟁이 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와 함께 '뱃살을 빼자' '머리를 심자' 등 상대방의 신체적 약점이나 '말짱 도루묵' '그렇지 뭐' 등 될대로 되라는 식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건배사는 가급적 피해야 할 터.
오해를 사는 발언 대신 반전을 주는 건배사도 묘미가 있다. '나(ME)를 뒤집으면 우리(WE)가 되듯이', '나힘들다'를 거꾸로 한 '다들힘내' 등이 그것.
좌중의 웃음과 함께 분위기와 기운을 북돋우는 건배사는 생활의 작은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기회가 오면 산뜻하고 의미 있는 건배사로 자신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감각 있는 현대인이 아닐까.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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