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게 무슨 사인일꼬?' … 야구감독의 현란한 손동작

야구경기 알쏭달쏭한 '사인의 세계'

▲ 2009년 WBC 한국팀 주루코치이자 대구 삼성라이온즈의 주루코치인 류중일 코치가 연속동작으로 사인을 내고 있다. 어떤 동작을 키(Key)로 정하느냐에 따라 사인이 결정된다.
▲ 2009년 WBC 한국팀 주루코치이자 대구 삼성라이온즈의 주루코치인 류중일 코치가 연속동작으로 사인을 내고 있다. 어떤 동작을 키(Key)로 정하느냐에 따라 사인이 결정된다.

#1. 지난 3월 9일 WBC 아시아라운드 1·2위 결정전, 대 일본전. 7회초 무사 2, 3루 상황. 2루에는 김태균, 3루에는 김현수가 자리잡았다. 타자는 이대호. 1대0으로 불안한 리드를 지키고 있었기에 덕아웃은 바빠졌다. 적어도 1점은 뽑을 수 있는 상황. 김인식 감독은 강공 사인을 냈다. 대신 내야땅볼이 나올 경우 뛰지말 것을 강하게 주문했다.(당시 3루 주루코치였던 류중일 코치는 한국말로 "땅볼 나오면 뛰지마라, 무사니까"라고 했다고 한다.) 무사 상황이었기에 이대호가 내야땅볼로 아웃되더라도 다음 타자의 한 방을 노릴 수 있어서였다. 일본이 원래 수비 위치보다 서너걸음 앞으로 전진, 더 이상의 득점을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탓도 있었다.

외야에 희생플라이나 안타 한 방이면 쉽게 득점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대호가 친 공은 원바운드로 유격수에게 잡혔다. 원래대로라면 김현수가 뛰어선 안됐다. 하지만 공이 원바운드되면서 타구가 느리다고 판단한 김현수는 홈으로 뛰었다. 홈에서 아웃. 문제는 김현수가 홈으로 뛰어들면서 아웃되더라도 런다운 플레이를 기대한 김태균이 3루로 뛴 것. 김태균마저도 객사하고 말았다.

물론 이 경기에서 한국은 일본은 1대0으로 이겼다. 하지만 야구팬들과 언론은 2009 WBC 경기 기간 중 이 상황을 '최악의 주루플레이'로 기억했다. 특히 일부에서는 이 같은 '최악의 주루플레이'를 막지 못한 덕아웃의 '사인 미스'를 탓하기도 했다.

#2. 지난 3월 24일 WBC 결승전, 대 일본전. 3대3으로 팽팽하게 맞선 10회초 2사 2, 3루 상황. 2루에는 이와무라, 3루에는 우치카와가 자리잡았다. 투수는 임창용. 타자는 스즈키 이치로. 스트라이크 하나만 잡으면 삼진아웃, 혹은 범타로 처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2스트라이크 1볼 이후 이치로는 연속해서 3개의 파울을 쳤다. 한국 덕아웃은 임창용에게 어렵게 승부하라는 의미로 '양팔을 八 자 모양'으로 내렸다. 얼핏 보면 진정하라는 뜻으로 보이지만 당시 한국팀에서는 이 사인이 '공을 낮게, 구석구석으로 던져 어렵게 승부하라'는 의미의 사인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이치로의 안타.

김인식 대표팀 감독은 경기 후 공식 인터뷰를 통해 "고의 4구가 아니더라도 볼로 승부하라는 사인을 보냈고 포수 강민호도 전달했는데 투수가 놓친 것 같다"고 말했다. "포수가 바뀌어 사인이 잘 맞지 않았는지 임창용이 왜 스트라이크를 던졌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아시아라운드 1·2위 결정전과 2라운드 승자대결 일본전에서 소방수로 등장해 두 번이나 불을 끈 임창용이었지만, 마지막 사인 하나 때문에 일부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소통의 부재는 자칫 오해를 낳고 오해는 겉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기 일쑤다. 야구 경기의 의사소통 수단, '사인(Signature)'. 우리에게 한없는 즐거움을 선사한 지난 WBC에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사인 미스'가 터져 우리를 난감하게 만들었었다. 손, 귀, 코, 턱 신체 일부는 물론이고 모자챙, 벨트까지 동원되는 사인의 세계. '야구깨나 본다'는 마니아도 좀체 파악하기 힘든 사인에도 법칙은 있으며, 최대한 단순하게 만든다는 게 야구계의 정설이다.

◆확실하게 표현한다

보내기번트, 기습번트, 스퀴즈번트(3루에 주자가 있을 경우 안전하게 점수를 내기 위해 번트를 대는 것), 치고 달리기, 도루, 더블스틸(Double Steal·주자 2명이 동시에 도루를 시도하는 것), 딜레이드 도루(Delayed Steal·일반적인 도루를 할 때보다 상대적으로 늦게 출발, 상대의 허를 찌르는 도루), 슬래시(Fake bunt-slash·타자가 번트 동작에서 갑자기 타격자세로 바꿔 치는 것) 등등.

프로팀의 경우 주자의 비명횡사를 막기 위해 한 게임에도 여러가지 작전을 구사한다. 모두 주자가 있을 때 나오는 사인으로 병살타를 막기 위한 작전.

사인이란 선수와 코치진과의 약속. 때문에 무엇보다 사인은 선수가 헷갈리거나 이해 불가능한 것이어서는 안된다. 포수-투수, 타자-감독, 주자-감독, 포수-감독 간 사인은 손, 팔꿈치, 어깨, 허리 등 주로 신체 부위를 이용한다. 특정 동작이나 유니폼의 일부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긴 하다. 눈, 뺨, 눈썹을 따라 이동할 경우 타자와 코치간의 거리가 20m 이상 떨어져 있기 때문에 헷갈리기 십상. 따라서 포수와 투수가 사인을 교환할 때처럼 손가락 몇 개를 펴 사인을 주지는 않는다.

예외적으로 손가락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단순한 손동작이 들어가는데 이런 간단한 사인도 각 구단마다 다르다. 손동작의 경우 예를 들어 상대편 투수의 제구력이 나쁘다면 '웨이팅(Waiting) 사인'을 내기도 한다. 이때 감독의 사인을 받은 코치는 주먹을 쥐거나 손바닥을 펴거나 손가락 하나를 펴보인다. 주먹을 쥐는 것은 주차할 때 '정지하라'는 사인이기도 하다. 손가락 하나는 '공 1개를 더 보라'는 표시. 손바닥을 펴는 것은 '여유있게 지켜보라'는 뜻이다.

◆'키(Key)'를 확인해야한다

손동작으로 표시하는 간단한 사인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신체 여러 부위를 이용한, 복잡한 형태의 사인이 전달된다. '머리, 어깨, 손등, 팔꿈치, 손등, 팔 쓸어내리기, 모자챙 만지기, 손등, 머리, 손뼉치기'. 이정도의 사인이 나오면 상대편 선수는 무슨 뜻인지 알아채기 힘들다. 하지만 소속팀 선수들이 금새 알아채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키(Key)'가 되는 동작이 있어서다. 키란 '특정 동작'을 의미한다. '키' 이후에 나오는 사인이 '진짜 사인'이라는 표시. 예를 들어 손등을 만진 뒤 나오는 동작이 진짜 사인이라고 하면 '손등이 키'가 되는 것이다. (그림참조) 앞선 예에서 손등이 '키'라면 결국 팔을 쓸어내리는 동작이 '진짜 사인'이 되는 것. '스퀴즈, 치고 달리기, 단독 도루' 등 여러 가지 작전이 바로 '키' 다음 사인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때문에 야구선수들이 잊어선 안되는 '키'는 경기 당일 정하는 게 대부분. 물론 경기 중간에 바뀌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3이닝마다 한 번씩 '키'가 바뀌기도 한다. 1~3회는 손등, 4~6회는 어깨, 7~9회는 모자창으로 '키'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선수들이 '키'를 헷갈려해 코치에게 다시 사인을 내달라고 요청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 경우는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사인이 길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타자가 코치에게 재차 요구하는 것이어서 눈치빠른 몇몇은 알아챌 가능성도 있다. 이보다 더 큰 부작용은 '저 팀에서 뭔가 잘 안 맞아 돌아가고 있다'는 뜻으로 비치기 쉬워 팽팽한 경기가 지속될 때 이런 사인 혼동이 나오면 긴장하고 있다는 정황으로 판단, 자칫 상대팀의 기가 살아날 수 있다. 그렇다고 매 이닝 '키'를 바꾸기도 힘든 노릇. 자칫하면 상대팀을 혼란에 빠트리려다 자승자박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키(Key)'를 놓치면 사인미스가 나온다

말로 해도 오해가 생길 여지가 있는데 심지어 사인은 오죽하랴. 한 번의 사인미스로 경기를 망치는 경우가 있기에 사인에도 '취소사인', '사인을 마무리하는 사인'이 따로 있다. 손을 내젓는 등 누구나 알 수 있는 몸짓으로 취소 사인을 정하진 않는다. 취소 사인은 각 구단마다 다른데다 영업상 기밀(?)에 해당돼 알기 힘들다. 다만 사인을 끝냈다는 뜻의 '피니시(Finish) 사인'은 대체로 단순하다. 손뼉을 치든지 두 주먹을 아래 위로 부딪치는 등의 형태로 끝난다.

이렇듯 사인이 팀별로도 비슷하다보니 상대팀 주루코치가 내는 사인을 유심히 지켜보는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 비슷한 사인 형태도 있는데 낌새를 먼저 채는 게 임자다. 따라서 모든 팀들은 적어도 3가지 형태의 사인을 시즌 전 미리 만들어놓고 시범경기때 쓴다. 물론 지난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주로 상체를 이용해 사인을 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키'가 뭔지만 기억하고 있으면 상대팀이 눈치채지 못하는 작전 구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WBC 대회 때는 예외였다. 외국 선수들과 단판 승부가 많았기 때문. 예외적으로 일본과 5번의 경기를 했지만 정작 사인을 읽는 경우는 없었다. 사인을 분석하는 것보다 투수의 구질배합이나 위닝샷(Winning shot)을 분석하는 게 급선무이기 때문. 사인 분석요원을 둘 수도 있겠지만 분석이 다 됐다 싶으면 이미 게임은 끝.

예외적인 경우가 있긴 하다. 시즌 중간에 트레이드된 선수의 경우 전 소속팀의 사인을 알고 있어 변형하기도 한다. 하지만 '키'를 달리 하면 여간해서는 눈치채기 어렵다.

◆사인을 잘못 읽으면 벌금을 내야한다

이렇듯 사인미스를 방지하기 위해 WBC 아시아라운드 1·2위 결정전때 류중일 코치가 3루 주자인 김현수에게 '사인 확인사살'을 했듯, 베이스 코치들은 주자와 한 번 더 사인을 주고받는 경우가 많다. 특히 1루에 주자가 있을 때 베이스 코치는 선수에게 간단한 사인을 보낸다. 실제 WBC 경기에서 사인이 끝난 뒤 베이스 코치가 왼손으로 머리 위를 치면 '그린라이트(Green light·주자가 스스로 판단해서 도루할 수 있는 권리)', 오른손으로 머리 위를 치면 '뛰지 말라'는 사인이었다. 사인 없이도 뛸 수 있는 선수는 고영민, 정근우, 이용규, 이종욱이었기에 나머지 선수들에게는 코치의 왼손, 오른손이 중요했다.

이렇게 '확인사살'을 거쳤음에도 선수가 사인을 잘못 읽을 경우 결과가 좋든 나쁘든 벌금을 맞는다. 국내 프로팀들의 경우 10~50만원 정도의 벌금을 부과한다고 하니 선수들도 집중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반면 사인을 내는 감독들도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있다. SK 와이번스의 김성근 감독은 2007년 한 방송에 해설자로 나서 자신의 사인미스 이력을 들려준 적이 있다. 김 감독이 경기 도중 날씨가 추워 팔짱을 끼고 있었는데 팔을 빼는 순간 주루코치가 사인을 선수에게 전달하고 있었다는 것. 당시 SK 와이번스는 팔짱을 끼었다가 푸는 것이 게 스퀴즈 사인. 때문에 3루에 있던 주자가 타자의 번트도 없이 홈으로 뛰어들다 아웃됐다.

감기 기운이 있어 콧물을 훌쩍거리다 손을 코로 가져간 것을 주루코치가 주자에게 사인으로 전달해 도루에 실패한 것도 있었다. 코를 만지는 것은 도루 사인이었다. 두 사례 모두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나온 사인 미스였다.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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