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랑과 집착의 줄타기…영화 '우리집에 왜 왔니'

'사랑'과 '집착'의 경계는 무엇일까? 영화 리뷰를 쓰기에 앞서 노트북을 켜놓고 한참을 머뭇거렸고, 그동안 단물이 다 빠질 때까지 영화를 되씹었고, 그러다 보니 씹다가 책상 밑에 붙여둔 껌 덩어리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채 두 단어가 남았는데, 바로 사랑과 집착이었다. 사랑하는 것은 연인이고, 집착하는 것은 스토커라는 이분법적 답변은 내리지 마시라. 당신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상대방에게 지긋지긋한 집착일 수도 있음을 왜 모르는가? 그러고 보니 '지고지순'과 '지긋지긋'은 참 닮았다. 말뿐 아니라 느낌까지도.

◆사랑과 집착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모텔방 침대에 나란히 누운 두 남녀. 나란히 누웠다는 말은 볼 일은 다 봤고, 그렇다고 벌떡 일어나자니 너무 무심한 듯하여 시간을 때우고 있다는 뜻이 되겠다. 아무튼 남자는 결혼 10년차, 여자는 결혼 5년차의 불륜 관계. 여자가 말한다. "당신 와이프 어때? 요즘도 당신만 사랑한대?" 남자의 대답. "그러게 말야. 미친년. 도대체 남자가 숨 쉴 공간을 안 줘요. 답답해 미치겠어." 100m가량 떨어진 다른 모텔 방에는 아까 남자가 말하던 바로 그 '미친년'이 다른 남자와 침대에 역시 나란히 누워 있다. 둘의 대사는 남녀를 바꾸면 똑같다. 덧붙여 조금 보태자면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직도 내가 저만 좋아하는 줄 알아. 미친놈." 아마도 이런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말이 '웃기고 자빠졌네'쯤 되겠다. 사랑과 집착을 말하자니 전혀 엉뚱한, 하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이 문득 떠올라 버렸다.

영화 '우리집에 왜 왔니?'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남자와 누구로부터도 사랑받을 수 없는 여자의 이야기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개봉 전에 떠들던 것처럼 그저 '미친년'이나 노숙자, 가택 무단침입 따위의 이야기가 전혀 아니다. 지독히 슬픈 이야기이고 너무 슬프다 보니 눈물만 줄줄 흘릴까 싶어서 코믹 코드를 접목한 그런 영화다. 사랑은 집착으로 변질되고, 집착은 미움으로 이어지며, 미움은 비극으로 치닫고 만다. 영화 속 여주인공은 "무엇을 해줄까?"라고 묻는 남자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날 봐." 아파트나 고급 승용차를 사달라는 것도 아니고, 1년에 한 번 해외여행시켜 달라는 것도 아닌데, 그냥 자신을 봐 달라는 것인데 왜 비극이 돼 버렸을까?

◆사랑할 수 없는 남자 VS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

12월 추위가 매섭던 강원도 산골의 한 외딴집 비닐하우스 안 김치냉장고 포장상자 속에서 한 여자가 숨진 채 발견된다.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빳빳하게 굳어버린 그 여인의 소지품 속에는 전형적인 노숙자들의 물품과 함께 한 다발의 우편물이 나온다. 경찰은 행여 죽음의 단서를 찾을까 싶어 우편물의 주소를 찾아가는데. 쓰레기 더미가 마당에 잔뜩 쌓여 얼핏 버려진 듯 보이는 서울의 한 주택. 현관문을 빼꼼히 열어보던 잠옷 바람의 남자는 경찰을 보고는 다짜고짜 맨발로 달아나기 시작한다. 어쭙잖은 추격전 끝에 경찰서에 잡혀온 남자는 죽은 여인을 아느냐는 경찰의 물음에 "본 것 같기도 하고…"라며 말끝을 흐린다. 왜 사진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느냐는 추궁에 남자는 뜬금없이 이렇게 말한다. "웃고 있잖아요." 죽은 여인의 웃는 모습(?)을 쳐다볼 수 없는 남자의 사연은 과연 무엇일까?

남자는 정말 잘나가던 샐러리맨이었다. 대기업에 다니며 누구보다 앞서 승진했고, 갖고 있는 주식은 주가지수와 상관없이 치솟기만 했고, 별 생각없이 사둔 주택은 조만간 재개발될 예정이었다. 사랑하는 여인은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장밋빛 희망들은 어느 순간 마치 꿈인 양 산산히 부서져버렸다. 그로부터 3년간 남자는 '동반 자살'을 꿈꾸며 자살여행에 함께 다녔지만 죽는 게 쉽지만은 않다. 어느 날 거실에서 목을 매고 숨지려는 순간,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노숙자풍의 여인이 거실로 들어온다.

"다녀왔습니다"라면서 아주 당당하게. 목을 매단 채 버둥거리는 남자를 구해준 노숙자 여인은 그 후 3주 동안 남자를 꽁꽁 묶어놓고 동거 아닌 동거에 들어간다. 노숙자 여인이 이곳으로 찾아든 이유는 건너편 집이 잘 보이기 때문. 그 집에는 자신의 운명적 동반자라고 믿는 남자가 살고 있다. 이들 둘의 이야기는 다시 약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교에 소문이 파다할 정도로 '바보'이자 '미친년' 취급을 받던 여자는 20세 고교 3학년생. 그리고 여학생이 사랑한 남자는 13세 중학교 3학년생. 여자는 학년보다 나이가 많고, 남자는 학년보다 나이가 적다. 둘은 사랑에 빠지지만 앞서 스토리처럼 집착으로, 미움으로, 비극으로 치닫고 마는데….

◆사랑과 집착의 차이는 과연 무엇

지속적인 자살 강박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자 주인공 김병희 역을 맡은 박희순과 손톱 밑에 때가 꼬질꼬질한 노숙자 이수강 역을 맡은 강혜정의 연기력이 단연 돋보인다. 자칫 신파조로 흐를 뻔한 영화는 절제할 줄 아는 호소력을 지닌 박희순과 표면적인 독기스러움 속에 아이처럼 맑은 영혼을 내비치는 강혜정의 연기력, 시간을 넘나들며 영화 속 긴장감을 마음대로 요리해버린 감독 황수아의 연출력 덕분에 '독특한 매력이 흐르는 수작'으로 태어났다. 영화는 박희순이라는 배우의 새로운 발견이고, '웰컴 투 동막골'의 여일과 '연애의 목적'의 최홍을 멋지게 소화했던 강혜정의 재발견이다. 아울러 대사는 결코 진부하지 않으며, 예상을 뛰어넘는다.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남자' 병희를 떠나면서 '누구로부터 사랑받을 수 없는 여자' 수강은 '서로 역할을 바꾸면 될 텐데'라는 글을 남긴다. 동료 노숙자들에게 '크리스마스를 가족들과 보내기 위해서'라는 말을 남긴 뒤 아무도 없는 강원도 산 중턱 자신이 살던 집으로 떠나는 수강은 행여 병희가 자신을 찾아올 수 있도록 대문 앞 우유 배달 봉투에 집으로 오는 약도를 남긴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과 내가 다시 만나지 못한다면, 나는 다시 태어날 때 꼭 눈치 빠른 여자로 태어나겠다"고. 사랑과 집착의 차이를 알겠는가? 수강은 눈치 없는 사랑이 바로 집착이라고 이해했다. 겨울 추위 속에 김치냉장고 포장상자 속에서 얼어죽은 수강은 태어나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다. 보육원에서 자랐고, 고등학교를 다니며 살 곳이 없어서 산 중턱 외딴 집에서 혼자 살았다. 아무리 맞아도 눈물 한 번 흘리지 않았다. 그래서 '바보'라고 놀림받았던 수강이 눈치 없어서 사랑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다니…. 참 미안해진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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