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아닌 리스트가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장자연 리스트에 박연차 리스트, 청와대 행정관 성접대 리스트에 석면탈크 의약품 리스트까지. 그 리스트들에는 유력 언론사 대표부터 현 정권의 핵심 권력자들, 심지어 전 대통령과 그 부인에 이르기까지 올라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무엇보다 지도층 인사들의 배신과 여전한 탈선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 이름과 면면들만 놀라운 것이 아니다. 리스트들에 얽힌 사연들도 참담하긴 마찬가지다. 힘없는 신인 여배우들을 접대부 혹은 성 노리개로 삼아 온 연예계의 부끄러운 관행은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얼굴들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수백 개의 의약품과 어린 아이의 파우더에까지 석면이 섞여 있었다는 보도는 우리 사회의 천박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뿐만 아니다. 추한 리스트들이 연이어 터져 나오는 것을 보는 것도 너무 힘들다. 하루하루 힘들지만 성실하게 살아가는 서민들은 이 나라에 과연 희망은 있는 거냐며 탄식하고 있다. 내일에는 또 어떤 리스트가 터져 나올지, 과연 그 끝은 어디인지 불안하기까지 하다.
대체 왜 이런 걸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여전히 우리 사회가 투명하지 못하다는데 있다. 은밀한 곳이 너무나 많고, 그곳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부적절한 관계가 맺어진다. 청탁하고 접대받고. 부정한 돈 거래와 성 상납이 이루어진다. 성실과 실력으로 승부하려는 선량한 시민들은 좌절하고 심지어 목숨을 끊기까지 한다. 국제투명성기구(TI)의 2008년도 국가청렴도(CPI) 조사에서도 우리나라는 여전히 매우 부패한 나라로 나타났다. 투명성 지수가 180개 국가 중 40위, OECD 평균 7.11에 비해 크게 낮은 5.6으로 조사된 것이다.
둘째는, 지위와 권력의 속물화이다. 어느 자리에만 올라서면 군림하고 한몫 챙기려 한다. 봉사이어야 할 정치는 지배와 술수의 동의어로 타락했고, 편의의 수단이어야 할 돈도 그 자체가 목적이요 권력이 된 지 오래다. 장자연 리스트에서 보듯이 언론사도 연예 기획사도 권력이 되어 버렸다. 공공의 질서와 이익을 위해 봉사하라고 주어진 지위와 권한들이 사익을 위한 권력으로 남용되고 있는 것이다.
셋째는 우리 사회 전반의 도덕적 해이이다. 어느 새 우리 사회에는 전문가 윤리는 물론이고 사람의 도리마저도 땅에 떨어져 있다. 권력에도 도리와 절차란 게 있고, 기업인, 언론인, 종교인, 학자에게도 지켜야 할 윤리가 있기 마련인데, 도무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초등학교 때 배운 사람됨의 윤리와 아름다운 관계는 어디 가야 만날 수 있는 건지, 가슴이 답답해진다.
원인을 찾았으면 답은 간명해진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 사회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 개인의 도덕적 결단에 맡겨둘 일이 아니다. 사회의 제도와 문화를 전반적으로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 먼저다. 크고 작은 권력들에 대해서는 감시 체제를 가동시켜야 하며, 중요한 공적 의사결정과 경제적 거래들은 투명하게 공개되도록 해야 한다.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
둘째는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해야 한다. 그것의 핵심은 사회적 관계들을 수직적으로 조직하고 바라보는 20세기식 관점을 벗는데 있다. 우리도 위계적 관료제 사회모델에서 수평적 네트워크 사회모델, 즉 21세기 지식정보사회모델로 서둘러 이행해 가야 한다. 누구라도 군림하고 그 자리를 통해 한몫 챙기려 해서는 안 된다. 타인을 지배의 대상이나 사익 추구의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존하고 함께 협력해야 하는 동료로 생각해야 한다.
셋째는 땅에 떨어진 도덕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공익을 다루는 전문가, 사회적 결정에 참여하는 이들일수록 공과 사를 분별하고, 전문가 윤리를 실천해야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세우지 않고서는 사회 전반의 윤리도 살아날 수 없다. 사회를 탐욕과 투쟁의 무대로 여기는 어리석음을 털고, 배려와 상생과 협력의 장으로 여기는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검은 리스트들에 스트레스만 받고 있을 수는 없다. 힘들지만 그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일에 동참해 가는 일대 결단과 실천이 필요한 때다.
홍덕률(대구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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