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RP, TALF, PPIP.
위의 알파벳 4자로 이루어진 사자성어(?)들은, 미국 정부가 지난해 말부터 최근까지 연이어 내놓은 구제금융 프로그램들이다. 사실 내용은 간단하다. '부실 금융기관을 구제하는 데 정부 돈만 쓸 수 없는 형편이니까 어떻게 민간 자본을 끌어들일 것인가' 고민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이 금융 혹은 경제 용어들 자체는 보기만 해도 주눅 들 정도로 위압적이고 무섭지 않은가. 이에 따라 우리 사회에서도 '금융 지식'을 습득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금융 지식'이란 것에 대한 터무니없는 과대 평가와 숭배, 오해도 확산되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이런 우리 사회의 징후를 볼 수 있는 가장 뚜렷한 사례는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포털사이트 의 를 중심으로 진행된 '미네르바 사건'일 것이다. 심지어 미네르바를 소재로 한 소설까지 나왔는데, '금융 지식'에 대한 우리 사회의 동경과 공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재야 경제연구소의 소장이다. 그는 미래의 경제 상황을 예측할 수 있는 경제 모델을 개발해서 IMF 외환 위기 사태까지 예견했던 천재다. 다만(?) 세상은 그를 무시한다. 그러나 IMF 사태가 터지자 그는 천재성을 인정받으면서 대통령 자문기구의 위원으로 발탁된다. 그러나 영웅의 시련은 쉽게 끝나지 않는 법. 미국은 한국의 산업은행에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를 인수하라고 로비하고, 주인공은 이를 막기 위해 '지혜의 여신'(미네르바!)이라는 필명으로 인터넷에 글을 게재한다. 그의 거사로 산업은행의 리먼 브러더스 인수가 수포로 돌아가자, 드디어 세계 경제의 막후인 유태인 금융그룹이 나선다. 그들은 하필 일본과 연대해서 한국 경제를 점령하려 한다.
이 소설은 '지식 영웅'에 대한 이야기다. 유비가 돗자리 짜는 민초 속에서 나왔듯이 이 소설의 주인공 역시 '재야'의 '천재'다. 더욱이 전우치나 홍길동처럼 관료로 발탁되고, 유태인 금융그룹과 일본이라는 강력한 적과 음모가 등장한다. 비운의 영웅이 등장하는 한편의 傳奇(전기) 소설 같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금융 지식에 대한 소설의 관점이다. 이 작품에서 금융 지식은 상식과 멀리 떨어진, 그리고 생활인이 도달하기 어려운, 어떤 '비밀스러운 지식', 심지어 神智學(신지학)이나 연금술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지식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주인공은 (남들은 눈치 채지 못한)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을 예언하고, '미래의 경제 상황을 예측할 수 있는' 모델을 개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신 같은 지식인이든 이런 모델을 만들 수는 없다. 무엇보다 이런 모델이 존재해서 우리가 미래를 완벽히, 혹은 어느 정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면 시장 경제 그 자체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시장 경제의 필요 조건은 불확실성이다.)
더욱이 이 같은 특정 지식에 대한 숭배는 불가피하게 그 소유자에 대한 숭배로 이어진다. 인터넷을 휩쓴 미네르바에 대한 열광, 그리고 일개 네티즌을 국사범 수준으로 격상(?)시키면서 인터넷을 압박하는 검찰의 대응을 보라. '3월 위기설', 혹은 '한국 외환보유고가 바닥났다'고 자신만만하게 예언했던 어떤 학자들과 이들에게 향했던 뜨거운 호응을 보라. 심지어 미네르바 자신도 이런 '오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체포되기 직전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IMF 사태 당시 월가에서 파생금융상품을 설계해서 … 조국의 국부를 유출했으며 … 사죄하고 용서를 구한다"고 자신을 소개한 바 있는데 이는 이라는 일본 만화에 등장하는 '금융 영웅'과 정확히 일치하는 설정이다. 한국의 유력지 중 하나인 가 '가짜 미네르바'에게 완벽히 속아 넘어간 해프닝도 금융 지식에 대한 공포 및 이로 인한 동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현상들은 결국 금융 부문이 전체 세계 경제를 주도해왔으며 대공황 이후 최악이라는 현재의 경제 위기를 초래하기까지 했지만, 정작 대중이 이런 현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는 '금융 지식'이 가공되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금융) 지식을 천재와 물신숭배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수많은 경제학자들, 현장에서 뛰는 금융인들, 언론 등의 분발이 필요하다.
이종태(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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