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낙동·백두를 가다] 국립공원 주왕산 역사 바로세우자

주왕암 뒤 좁은 계곡에 꼭꼭 숨은 주왕굴. 주왕굴은 주왕산 역사 논쟁의 주인공인
주왕암 뒤 좁은 계곡에 꼭꼭 숨은 주왕굴. 주왕굴은 주왕산 역사 논쟁의 주인공인 '주왕'이 최후를 맞이한 곳이다.
국립공원 주왕산은 청송을 대표하는 산이다. 주왕산은 청송 역사의 상징적 존재이자 청송의 정신이 깃든 곳으로, 이제 주왕산 역사 재조명을 통해 청송의 역사·문화를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국립공원 주왕산은 청송을 대표하는 산이다. 주왕산은 청송 역사의 상징적 존재이자 청송의 정신이 깃든 곳으로, 이제 주왕산 역사 재조명을 통해 청송의 역사·문화를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천년의 땅 안동의 역사·문화를 가슴에 새기고 일행은 이웃 청송으로 향했다.

봉화의 고산준령을 경험하였기에 '두메산골' 청송 답사에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럼에도 청송은 일행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청송으로 가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다. 영천에선 노귀재, 포항은 꼭두방재, 안동은 가랫재, 영덕에선 황장재를 넘어야 한다. 어느 쪽에서 청송을 가든 재를 넘지 않고는 들어설 수 없다. 예부터 청송을 찾는 길손들은 인적이 끊긴 산길을 수백리 이상 걸어 하늘과 맞닿은 고개를 넘어야 했고, 다시 깊은 하천 계곡을 따라 하염없이 걸어야만 당도할 수 있었다. 청송은 지금도 그러하다. 고속도로는커녕 지역마다 그 흔한 4차로 도로 하나 없다. 청송은 '육지 속의 섬'이었다.

제대로 된 공장 굴뚝 하나 찾을 수 없으니 청송은 분명 현대문명과 격리된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문명으로부터 소외된 열악한 환경이 지금은 오히려 또 다른 청송의 자랑거리로 남고 있다. 난개발을 하지 않고 조상대대로의 자연을 그대로 간직한 차별회된 고장이 바로 청송인 것이다.

그래서 옛 선현들은 청송을 '신선의 고장'이라고 했다. 과거 명현 거유들이 타락한 속세를 버리고 심신수양과 학문을 위해 청송에 터를 잡았다. 이름을 날린 명현은 물론 수많은 선비들이 더 인간답고 가치 있는 삶을 위해 청송을 찾았고, 그래서 청송을 지금까지 신선의 고장으로 이어오게 한 원동력이 아닐까?

일행은 신선의 땅 청송부터 느낀 뒤 다시 주왕산으로 향했다. 봄 꽃놀이를 위해, 산행을 위해 주왕산을 간 것은 아니었다. 주왕산에서 '우리 것'을 찾아볼 요량이었다.

주왕산의 대표 사찰인 대전사를 뒤로 돌아 30분 정도 걸어가면 깎아지른 절벽 아래 터를 잡은 절 주왕암이 나온다. 주왕암 뒤편으로 들어서면 양 절벽에 짓눌릴 만큼의 깊고 좁은 협곡이 나오고 협곡을 따라 숨가쁘게 한참 올라가면 '주왕굴'이라는 천혜의 요새가 시야에 잡힌다. 얼마나 깊기에 녹음도 없는 초봄에도 햇살조차 접근을 막고 있었다.

일행이 주왕굴에 간 이유는 주왕산 역사의 첫 시발점인 '주왕'(周王)이 최후를 맞이한 곳이기 때문이다. 주왕산은 '주왕'이라는 사람의 호칭에서 따왔다. 전국에 수많은 산이 있지만 사람의 이름을 딴 산은 거의 없다. 그만큼 주왕산은 '주왕'과 절대적 관련이 있는 것이다. 주왕산은 주왕이 머물렀다고 해 '주방산', 주왕이 은둔했다고 해 '대둔산'으로도 불리고, 주왕과 관련된 지명 유래가 지천에 깔려 있다.

주왕이 무기를 숨겼다는 무장굴, 주왕의 군사가 훈련을 했다는 연하굴, 주왕의 시체를 화장했다는 범굴, 최후를 마친 주왕과 그 군사들의 피가 주방천에 흘러 그 이듬해 검붉은 반점의 수달래가 주방천 가에 흐드러지게 피었다는 전설, 주왕의 장수가 지휘를 했다는 장군암, 주왕의 딸 백련의 이름을 따서 지은 절 백련암,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의 이름을 따서 지은 절 대전사 등이 그러하다.

주왕이 마 장군과의 싸움이 치열할 때 잠시 말에서 내려 쉬었다고 해 하마, 마 장군과 주왕이 전투를 벌일 때 마 장군이 진을 치고 있었던 곳이라고 해 진골 등 주왕산 인근 마을 유래에도 주왕의 흔적이 전해지고 있다. 그 옛날 청송인들에게 주왕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현재 주왕산 유래 전설은 당나라 때 후주천왕을 자처해 반란을 일으킨 '주도'(주왕)가 신라로 잔병을 이끌고 와 주왕산에 숨어들었고, 당나라가 주도를 치기 위해 고려의 왕에게 명해 고려 왕의 명을 받은 마 장군이 주왕산에서 주도의 최후를 맞게 했다는 스토리가 크게 알려져 있다.

그러면 정말로 주왕이 현해탄을 건너, 아니면 요동과 지금의 북한 땅을 거쳐 수만리 떨어진 주왕산에 숨어 들었을까? 주왕굴 앞 주왕암의 안내판조차 소위 '중국설'을 적고 있으니 과연 주왕산의 주왕이 중국인이었을까?

조선 중기 청송인인 매화 서활이 적은 주왕사적 발문에선 주왕이 중국을 배반한 역적이고, 고려왕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그를 토벌하도록 하였다면 마땅히 동국의 역사에 나타나야 하는데 아직 듣지를 못하였다고 했다.

주왕산삼암기에는 주왕산의 주왕에 대해 옛날 신라의 풍모가 걸출한 왕자가 명주(지금의 강릉)에 은거해 살다가 죽어 '주원왕'이라고 했고, 왕자 때 지금의 주왕산에 은거해 그가 바로 '주왕'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 왕자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7대손인 명주군왕 김주원이다.

청송의 주요 역사·문화 전문가들은 주왕은 중국인이 아닌, 신라의 왕족인 김주원 또는 신라 말 혼란기에 왕권 다툼 과정에서 난을 일으킨 김헌창(김주원의 아들)을 지칭하는 것이고, 이들이 어떤 형태로든 주왕산에 은둔했거나 청송인과 깊은 관계를 형성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주왕이 누구인지에 대한 그 어떤 역사적 근거 자료는 없지만 주왕산과 청송 일대에는 지금의 지명 유래 등으로 미뤄 신라 말을 전후로 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있었고, 청송인들이 당시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은 확연해 보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왕산 역사의 태동을 '중국의 것이냐, 우리의 것이냐'로 보는 문제다.

청송인들은 주왕산 역사의 시작을 우리의 것으로 증명해가고 있다.

강병극 청송군 전략기획팀장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주왕산은 조선에 이르러 퇴계 이황, 학봉 김성일 등 당대의 석학들이 주왕산의 기품을 글로 담아냈고, 수많은 명현 거유들이 주왕산에 머물렀다. 이를 볼 때 조선 이전 고려와 신라 때 역시 주요 인물들이 주왕산에 머물렀고, 주왕산에 지금의 지명과 전설의 근거를 제공하지 않았겠는가. 주왕산의 역사는 근거도 없는 중국의 것이 아닌 당당한 우리의 것이다."

청송은 이제 주왕산의 역사부터 바로세워야 하지 않았을까? 이제 청송은 주왕산을 알리는 안내판부터 우리의 역사를 써야 하며 그래야 주왕산을 찾는 사람들이 그 의미를 제대로 느끼고 널리 알리지 않겠는가.

이종규기자

청송·김경돈기자

사진·이채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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