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생 사업을 하면서 좋은 일도, 힘든 일도 많았습니다. 이제는 젊은 시절 가난 때문에 접었던 가수의 꿈을 이루고 싶습니다."
신소일(67·경산시 정평동)씨의 본업은 발파업체 사장, 부업은 트로트 가수다. 드릴로 바위를 뚫고 폭약을 터뜨려 부수는 일을 20년 가깝게 해 왔다. 달성군 현풍이 고향인 그는 젊은 시절에 버스 운수업체를 경영했고, 중장비 임대업으로 큰 돈을 벌었다. 그러다 사업 실패로 업체가 줄줄이 부도가 났고 큰 병을 얻기도 했다. 그런 그가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트로트CD를 냈다. 제목 '감포 항구'다.
"부도로 힘들 때 감포 푸른바다를 보면서 위로를 많이 받았어요. 그런 감포항이 쇠락해가는 모습이 안타까웠어요. 언젠가 감포항에 유람선이 정박하는 관광명소가 되기를 기대하며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임을 찾아 여기왔네. 감포항구야~', 조씨 휴대폰 컬러링은 자신의 노래다.
알고 보니 그는 이미 여러 곡을 발표한 향토가수다. 1995년 대구 상인동 가스참사로 인한 시민들의 슬픔을 달래주기 위해 '대구여 말해다오'를 냈고, 대구가 국제도시로 발돋움하기를 기원하며 '황혼의 대구공항'을 불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기리며 '금오산 엘레지'를 부르기도 했다. 남이 알아주건 말건 음반을 내고 노래를 불렀다.
조씨가 노래와 인연을 맺은 건 능인고 학생 시절이다. 당시 오아시스 레코드 주최로 옛 대도극장에서 열린 가수모집 콩쿠르에 참가했다, 한 작곡가에게 발탁됐다. 그러나 집안 형편 때문에 가수의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먹고 사는 일이 우선이었다. '버스기사인 아버지에게 버스 한 대를 사드리고 싶다'는 생각에 몇 년간 돈을 벌었고, 그게 사업의 시작이었다. 1960년대 버스여객업체를 운영하며 번 돈은 70~80년대에는 중장비 임대 사업으로 크게 불어났다. 40대 중반에 이미 여러 업체와 부동산을 가진 큰 부자가 됐다. 그러다 86년 즈음 수년 간 매달렸던 중국내 버스회사 설립사업이 무산됐고 빈손이 됐다. 10여년간 두문불출하다시피 지내다 다시 벌린 사업은 IMF로 큰 손해를 안겼다. 재산 대부분을 처분했다. 마음을 다잡고 현재의 발파업체를 정상궤도에 올려놓기까지 적잖은 세월이 흘렀다. 노래를 다시 부르기로 하면서 인터넷 카페도 만들었다.
"인생의 고락이 많았어요. 이제는 복지시설이나 병원을 찾아다니며 힘겨운 삶을 사는 이웃들에게 제 노래로 힘을 주면서 봉사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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