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모호한 햇살이 자주 창에 다가와 어른거렸다. 어느 날은 재앙이라도 내릴 듯 누런 황사가 떠다니더니, 어느 날은 아파트 9층 베란다까지 흰 꽃잎들이 나비처럼 날아 올라왔다. 나도 모르는 새 진달래 개나리가 만발하고 목련과 벚꽃이 지고, 창 밖에는 하수상한 풍경들이 어른거렸다.
병원과 집을 오가는 새 사월 중순이 되었다.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짐승처럼 오랜만에 산책길로 접어들었다. 포화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랐을 꽃들은 모두 지고 새 잎들이 돋고 있었다. 해산한 여자처럼 부기 있는 얼굴로 산기슭의 채전을 서성거렸다. 비닐과 깨진 유리 조각들이 번쩍거리고, 눈이 부셔 깜박 나를 놓칠 뻔했다. 삶은 멀리 아득하고, 기우뚱, 깨진 거울의 틈으로 빨려드나 싶었다.
봄빛이 얼굴을 찔러대고 목덜미로 칼집을 넣는다. 무엇을 보라고 '봄'이라는데, 잔치 끝난 집에 구경 온 것처럼 머쓱해진다. 이따금 주인과 말 건네던, 천 평 정도 된다던 포도밭엔 그새 거름을 한 번 더했는지 쇠똥 냄새가 솔솔 피어오른다.
지난가을 옥수수 이모작을 끝낸 자투리 밭엔 보리 이랑이 파도를 치고 있다. 문득 박화목의 시에 윤용하가 곡을 붙인 노래가 떠오른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뵈이지 않고 저녁 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박화목 시에 곡을 붙인 또 다른 가곡이 있어 흥얼거려 본다. 노래는 기억하는데 작곡가의 이름이 영 떠오르질 않는다. 내가 외는 2절 가사는 이렇다.
'저 파란 보리밭 사잇길을 다정한 이가 같이 섰고 잔잔한 봄바람 불어와서 사랑의 말을 속삭였네, 그러나 지금은 나 혼자 섰구나. 어느 먼 절간 종이 외로이 우는데 이토록 내가 그대 그리워 보리밭 길을 헤매이는가.' 윤용하의 곡도 좋지만 이 노래가 훨씬 소박하고 정겨워 보리밭을 지나치기라도 하면 가끔 불러보곤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노래가 요즘 오래 마음에 머물고 있다.
종달새 새끼들처럼 보리밭에 숨어서 숨바꼭질하다가 어른들에게 들켜 혼이 나던 어린 시절, 언덕 위에서 빤히 내려다보며 소리치는데도, 머리만 가리고 보리밭 이랑에 숨어 키득거리던 옛날이여, 나는 왜 거기 머물지 못하고 여기 이 보리밭 둑을 서성거리고 있나.
이따금 올라가는 무덤가에는 양지꽃, 별꽃, 제비꽃이 예전과 달리 드문드문 피어 있다. 무덤가를 오래 서성거리다 내려온다. 난데없이 모자와 옷자락을 낚아채며 까불락거리는 바람, 생기를 회복시켜주는 봄날이다.
걷다 보니 몸과 마음이 한결 회복되는 것 같다. 산책로의 볼품없던 느티나무 가지엔 연두색 이파리들이 가득 돋아 잔잔한 음악을 들려준다. 느티나무를 올려다보며 오래 서 있었다. 나무는 깊은 울림통을 가진 현악기처럼 조화로 가득 찬 화성을 울리며 저녁을 흔들고 있다.
삶을 앓는 사이 천국이 몰래 펼쳐졌다 사라져갔다. 하지만 천국의 육중한 문 틈 사이로 무언가를 엿본 것 같기도 하고, 숲 속으로 황급히 사라지던 얼룩무늬 호랑이를 본 것도 같다. 봄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두어 달, 진한 봄 속으로 사라져 나를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노래한 축복과 풍요의 땅 아르카디아는 원래 그리스 중부의 황량한 산악 지역이었다. 천천히 산책하며 노래를 흥얼거리며 내 집 주변에 흐르는 초라한 강과 들, 작은 숲이 고대 문호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재창조해낸 아르카디아라는 생각을 해 본다.
마음먹기에 따라 언제든 이 아르카디아의 요정이나 목동이 될 수 있고, 목신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봄이 간다. 이 봄, 붙잡지 않고 보낸다.
서영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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