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젬병', 형편없는 것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사회가 다양화되면서 각 분야별 전문화가 속도를 더하고 있지만, 정작 이 전문가들도 자기 일엔 '젬병'인 이들이 적잖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격.
특정 병이나 암에 관한 전문의가 바로 그 병으로 수술받는 경우도 있다. 그 병에 걸린 전문의는 수술을 더 겁낸다. '아는 것이 병'이라고 본인이 부작용이나 혹시나 하는 실수까지 염려하기 때문. 하지만 어쩌랴. 어디 병이 그 병을 고치는 전문의라 해서 피해갈까.
치과의사지만 본인은 틀니인 경우도 많다. 임플란트 시술도 좀체 하지 않는다. 안과의사인데 본인 눈은 고도근시로 인해 도수가 높은 안경을 끼고, 라식수술도 하지 않는 의사들도 볼 수 있다.
유명회사 결혼상담사가 30대 후반 또는 40대임에도 미혼상태이거나 이혼경험이 있는 경우도 어렵잖게 찾을 수 있다. 정작 본인의 자식교육은 포기해버린 교육 전문가도 있다. 펀드매니저가 자기 재산을 재테크해 반토막이 나기도 하고, 부동산 재테크 전문가가 아파트 2채를 샀는데 시세가 급락하기도 한다.
연세대 커뮤니케이션 전공의 한 대학교수는 "이론과 실제가 같은 수 있느냐"며 "닥쳐보라. 본인이나 가족들은 답이 안 나온다. 심지어 예수나 석가, 공자같은 성현들도 자기 일은 젬병"이라고 일갈했다. 또 "나 역시 감정이 섞이면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생긴다"고 털어놨다.
◆대장암 수술받은 전문의의 고백
"병이 사람봐서 찾아오나요." 15일 대구 수성구의 한 대장암 및 치질수술 전문의가 자신 역시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며 상세한 얘기를 해줬다. 그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인술을 베푸는 사람으로서 본인의 경험까지 솔직하게 환자에게 얘기해주며 의사이자 환자의 입장에서 진료에 임한다."고 말했다.
이 전문의는 15년 전 일본 국립암센터의 유명한 대장·직장암 전문의로부터 수술법을 전수받고 국내로 와 수많은 환자들의 대장암 수술을 해오다 3년 뒤인 1997년 본인이 덜컥 대장암 2기에 걸리고 말았다. 인정하기 싫고 참담했지만 이내 받아들이고 수술을 결심했다. 하지만 가족 몰래 많이 울기도 했다. 친구가 내시경 검사를 해 암을 발견했고, 수술도 대학 때 은사로부터 받았다. 참 아이러니컬했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그는 "수술 후 약 2년 만에 거의 회복했으며, 그 이후로는 주로 치질수술 전문의로서 삶을 살고 있다"며 "돌이켜보면 당시에 과도한 업무와 술, 스트레스 등이 병을 가져온 것 같다"고 고백했다. 지금은 술도 끊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기 때문에 정상인보다 더 건강하다.
그는 "등잔 밑이 어둡다"며 "의사들이 의외로 건강검진도 잘 받지않고, 본인의 질병에는 취약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자신이 아는 의사들 중에도 위암 걸린 위암 전문의, 직장암에 걸린 직장암 전문의 등이 있다고 했다. 한마디 더 덧붙였다. "의사들이 잘 안 털어놓아서 그렇지 의외로 저같은 경우가 많습니다."
◆각 분야별 젬병이들
국내 유명회사 전문 커플매니저들 중 정작 본인은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인 경우인데도 솔로인 경우가 많다. 특히 나이많은 미혼의 여성 결혼상담사들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고객들에겐 더 할 수 없는 최상의 상담자. 본인은 결혼에 골인하지 못했지만 누구보다 이론에 밝으며, 특히 결혼대상자들의 현 상황에 맞는 대상자들을 찾아내는 데는 달인들이다. 본인 결혼과 일은 엄격히 분리된 셈. 결혼상담소를 운영하는 중년 여성들 중에는 혼기가 찬 본인의 자녀가 3명이나 있음에도 1명도 결혼을 시키지 못한 경우도 있다.
(주)듀오 대구지사 한 관계자는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커플매니저 중 주변에서 어렵잖게 골드 미스들을 볼 수 있다"며 "또 당사자 일은 다른지라 가끔 이혼한 사람들도 있다"고 말했다.
재테크 전문가가 본인 재산을 관리하지 못해 반토막낸 경우도 허다하다. 지독한 경기불황에 장사가 없는 것. 한나라당 배영식 의원(대구 중·남구)은 당내에서도 기획재정위에 소속된 예산 경제통일 뿐더러 경제부처에도 근무했지만 주가폭락에는 별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배 의원은 지난해 말 사석에서 "하이고 요즘 어렵습니다. 주식을 청산하지도 못하고 골머리만 앓고 있습니다"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국회의원 중 최고 갑부인 한나라당 정몽준 최고위원의 주식이 반토막난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
10여년째 대구에서 아파트 분양대행사를 운영하는 있는 한 사장은 중구에 50평짜리 새 아파트 2채를 샀다 프리미엄은커녕 엄청난 손해를 봤다. 지금도 혼자만 속앓이를 하고 있다. 나름대로 성공한 부동산 전문가라고 생각했지만 분양가를 휠씬 밑도는 가격으로 떨어져버린 탓에 '누굴 탓하며 누굴 원망하랴'. 이 사장은 "죽겠심니더. 혹시 누가 알면 절 믿고 아파트를 사겠습니까"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뿐 아니다. 교육계에는 자식교육에 실패한 교육전문가들이 부지기수다. 달서구의 한 학원 원장은 "제가 운영하는 학원은 일류를 지향하지만, 우리 자식들은 포기했다"며 "학원에서는 실력있고 멋있는 원장인데 집에만 오면 폭군 가장이 돼 이성을 잃어버린다"고 토로했다. 교육청에 근무하는 장학관·장학사들 역시 자식들이 엇나가는데는 두손두발 다 들고 낙담한다. 소심한 한 교육청 간부는 "내 자식도 제대로 못하는데 남의 자식들을 무슨 낯으로…"라고 고개를 떨구기도 했다.
◆"전문가라고 뭐 용빼는 재주있나"
정작 자신의 일은 잘 풀어내지 못하는 전문가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내게 닥치면 상황이 180도 달라진다는 것'.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도 한 발 떨어져 훈수를 두면 잘 보이지만 막상 본인이 둘 때는 좋은 수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헤매게 되는 원리와 다르지 않다.
연애할 때 '뭣에 씌인 듯' 그 사람에게 빠지기 시작하면 주변의 어떤 얘기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도 이와 같지 않을까. '콩깍지가 씌었는데 무슨 허물인들 문제가 되겠는가'. 가족이나 주변의 반대에도 과감하게 결혼에 골인해 나중에 실체를 알고 고통받는 이들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한 언론사 사진기자는 일에는 거의 실수가 없었는데 정작 본인 신혼여행에서는 삭제버튼을 잘못 눌러 소중한 사진들을 다 날려버렸다. 종교지도자들 중에 신자나 신도들의 얘기를 듣다 본인이 더 흥분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이권과 관련된 무슨 문제가 생기면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고 영락없는 속세인이 돼버리는 것.
일본 속담 중에도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의미와 비슷한 '의사가 자기의 건강에 조심하지 않는다(명의도 자기 병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최근 의학드라마를 봐도 이 말은 꽤 일리가 있다. MBC드라마 '하얀 거탑'의 주인공 장준혁(김명민 분)은 담관암으로 최후를 맞았으며, SBS드라마 '외과의사 봉달희'의 이건욱(김민준 분)도 폐암에 걸렸다. 현실에는 이보다 더한 의사들도 많다.
김철수 계명대 심리학과 교수는 "스스로 닥친 일에 대해서는 잘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다각도로 살펴봐야 한다"며 "한 발 떨어져 보면 전문가가 될 수 있지만 막상 본인이 처하면 당연히 어려운 것이 세상사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