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는 사람이 많아야 먼지 한 톨이라도 떨어진다.'
이보다 더 재래시장에 알맞은 문구가 있을까? 대형 할인점과 백화점에 눌려 사지로 내몰리는 재래시장이 예술과 문화라는 갑옷으로 중무장한 채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예술이 흐르는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대구 중구 방천시장. 다윗의 지혜로 골리앗을 이길지 귀추가 주목된다.
◆예술이 꽃피는 시장으로…
16일 오후 2시쯤 대구시 중구 방천시장. 오가는 사람이 없어 시장이라기보다는 절간 같았다. 손님들의 차량으로 주차장을 가득 채운 채 시장 입구에 우뚝 서있는 대형 가족 레스토랑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시장 안에는 한 집 건너 서너 집은 빈 점포로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인적이 끊겨 쇠락한 시장의 첫 인상과는 달리 안에선 범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빈 점포마다 콧수염과 머리를 길게 기른 예술가들이 진을 치고 공예, 설치 미술, 회화, 사진 등 창작활동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예술가들의 손을 거친 낡은 점포들은 어느새 예술 작품으로 바뀌고 있었다.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골똘히 창작활동에 빠져있는 예술가들의 모습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한 점포 안에 들어서자 시골집 처마밑에 주렁주렁 달린 곶감처럼 수백여장의 크고 작은 종이 낱장들이 낚싯줄에 매달려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이곳은 하원식 화가의 작업실. 하씨는 "세상 모든 것들이 작은 입자로 구성돼 있듯 우리 몸도 수억개의 입자들이 모여 만들어졌다"며 "인체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을 만들 예정"이라고 말했다. 오랜 세월 동안 지켜온 시장의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빛바랜 벽지를 그대로 활용했다.
시장 귀퉁이에 있는 조그마한 주차장도 창작 활동으로 분주하다. 방진 마스크를 깊게 눌러쓴 거리 예술가 김환수 작가 팀이 시장 곳곳에 흉물스럽게 버려져 있는 벽면에다 벽화를 그려 넣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커멓게 얼룩져 있던 주차장 벽은 어느새 강아지와 VIP 등의 글귀가 새겨진 예술 공간으로 변했다.
1980년대 이후 끝없는 추락의 길을 걷고 있는 방천시장이 '방천시장 예술프로젝트 사업'으로 문화와 예술이 흐르는 공간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이 사업은 대구 중구청이 쇠퇴하는 재래시장을 살리기 위해 기획했다. 시장의 빈 점포에 예술가들을 입주시켜 작품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시장문화를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 시장에는 현재 작가·건축가 등 60여명이 빈 점포 19곳을 빌려 각 팀의 특성에 맞춰 이곳을 예술 1번지로 꾸며나가고 있다. 윤순영 중구청장은 "전통시장을 예술과 연계해 경쟁력이 있는 곳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새로운 실험을 진행중"이라며 "얼마 후면 방천시장이 크게 바뀌어 옛 영예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작가들은 전시작품을 즉석에서 팔기도 하며 틈틈이 일반인을 위한 예술 강좌도 선보일 예정이다. 특히 다음달 1일부터는 이제껏 재량을 뽐낸 작가들의 작품 전시회도 열린다. 빈 점포에 작업실을 낸 이정호 경북대 건축학과 교수는 "이곳에서의 생활 자체가 재미있는데다 상인들에게서 아이디어를 많이 얻는다"며 "건축가라고 하니까 상인들이 자신들의 가게에 못질을 해달라는 요청을 자주 해 '못 박는 전문가'가 됐다"고 웃었다.
◆사람 사는 냄새도 물씬…
예술가와 시장상인과의 '특별한 동거'가 시작되면서 시장에는 사람 사는 냄새가 솔솔 풍겨나고 있다.
1960년대부터 싸전과 떡전으로 유명했던 방천시장은 한때 상가 회원들이 700여명에 달할 정도로 대구를 대표하는 전통시장이었으나 손님의 발길이 차츰 줄어들면서 지금은 20~30개 점포만이 남아 고사 직전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고령의 상인들만이 하릴없이 손님을 기다릴 뿐 젊은이들의 소리가 끊긴 지 오래다.
하지만 예술 사업 추진 이후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시장은 학원가와 대학가의 현장 강의 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방천시장상인회 신범식(52) 회장은 "수십년째 침체돼 있던 시장이 학생들이 대거 몰려오는 등 이제야 사람 냄새가 난다"며 좋아했다. 50년간 이곳에서 곡물점을 운영해오고 있는 김수용(80) 옹은 "손자, 손녀 같은 대학생들이 시장을 찾을 때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면서 좌판에 앉아 시간만 죽이던 상인들도 덩달아 바빠졌다. 음료수, 무료 커피봉사는 물론 작가들의 조수역할도 마다하지 않는다. 점포 임대료를 깎아주고 즉석에서 막걸리 파티가 이뤄지기도 한다.
파전 같은 부침개를 파는 박종구(56)씨는 요즘 좌판을 비우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손수 만든 부침개를 들고 작가들을 찾아다니며 넉넉한 인심을 전달하고 있다.
특히 폐업한 지 오래된 중국 음식점을 개조해 만든 사업추진 사무실에는 상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연방 문턱을 넘나들며 이곳 신승균 코디네이터에게 질문 공세를 퍼붓는다. 신씨는 "하루가 머다하고 상인들이 사무실을 찾아 사업 진행상황을 묻곤 한다"며 "상인들이 예술가들에게 거는 기대가 무척 크다"고 말했다. 임상준기자 new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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