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를 일주일가량 앞두고 대구시 동구 지묘동에 자리 잡은 화실로 들어섰을 때 김준용(40)은 한창 작업에 몰두하다가 문을 열었는지 눈자위가 발그스레 충혈돼 있었다. 커피 한 잔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는 수줍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림 이야기가 나오면 눈이 반짝였지만, 자기 자랑에는 인색했다. 하지만 작품을 보는 순간 '갖고 싶다'는 충동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김준용은 은박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알려져 있다. "대학 시절 정말 열심히 담배를 피워 물었는데, 어느 날 문득 은박지에 그림을 그려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죠. 그때부터 담배 포장지를 모았습니다." 하지만 매끈한 은박지와 기름에 녹인 유화 물감은 서로 친하지 않았다. 수차례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은박지의 주름을 활용하는 방법을 떠올렸다. 구겼다 펴기를 반복해 주름이 잔뜩 생긴 은박지를 곱게 편 뒤 광목천에 풀로 단단히 붙여 붓질을 시작했고, 미세한 주름 속에 물감이 말라붙은 뒤 나이프와 마른 붓으로 긁어내기를 거듭했다. 그렇게 탄생한 밑그림은 몽환적 분위기를 풍기며 아련한 추억 속으로 이끄는 '시간의 문'으로 완성됐다. 밑그림은 아득하게 펼쳐진 갯벌일 수도, 초록빛이 너울대는 봄날의 밭일 수도, 어린 시절 한번쯤 길을 잃었던 숲의 기억일 수도 있었다.
주름진 은박지를 펴서 다시 광목천에 붙이는 데만 며칠이 걸린다. "어떨 때는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떤다. 하지만 정작 허리를 못 펴는 사람은 그의 그림 속에 있다. 노동이 힘에 겨워 쭈그리고 앉은 채 챙이 긴 모자에 덮인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아낙들. "성주 가야산 자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밭에서 일하는 모습들이 정말 예뻤습니다." 화가의 눈은 다른가 보다. 뙤약볕이 내려쬐는 그곳에서 허리조차 못 펴는 아낙들이라는 인상을 받았던 기자는 그림을 다시 봤다. 그곳에는 삶이 있었고, 생기가 넘쳤다. 그림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는 대상이다. 기억 속에 투영되는 그림은 작가가 다르고, 관객이 다를 수밖에 없다. 최근 김준용의 그림 속에 얼굴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얼굴. 수줍은 듯 뒷모습과 옆모습만 보이던 아이들이 정면을 응시하기도 한다. 인물을 그려내는 탁월한 실력 덕분인지 화폭 속에 작게 자리 잡은 인물들의 표정과 동작이 마치 살아있는 듯 뛰쳐나올 것만 같다. 은박지 그림으로 한국 화단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던 작가는 23일부터 5월 3일까지 갤러리 제이원에서 한층 성숙한 그림을 선보일 예정이다. 053)252-0614.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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