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자운영, 초록의 빛깔과 향기만 남아

임만빈 지음/푸른향기 펴냄

'냉정했고, 잘못에 용서가 없었던 아버지, 그러다가 지난 13개월, 아버지가 아프고 난 후, 아버지의 마지막 귀향을 옆에서 지켜 보면서, 나는 많은 다른 것들을 아버지에게서 새로 보았고, 그리고 아버지와 많은 교감을 나눴다.'

수필집 '자운영, 초록의 빛깔과 향기만 남아'는 대학 병원 교수이자 수필가인 지은이 임만빈이 13개월간 아버지를 간병하며 느낀 '내 아버지'와 '한 인간의 죽음'에 관한 글이다. 지은이는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식의 안타까운 심정과 한 인간의 죽음을 바라보는 의료인의 시각 사이에 서 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죽음은 '일상'이 아니며, 그렇다고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며 울부짖는 '오열'도 아니다.

책은 '아버지의 죽음'을 일관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병상 일기에 가깝다. 그러나 단순히 13개월 동안의 관찰기는 아니다. 지은이는 평생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열심히 살았던 아버지를 회고하며 그 아버지의 삶을 정리한다. 더불어 아버지의 죽음을 의료인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글은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보는 자식의 자리와 환자의 죽음을 바라보는 의료인의 자리를 오고 간다.

'아버지는 지금 당신에게 붙어 있던 것들을 하나하나 떨어내고 있다. 고향을, 정신을, 그리고 언어를 떨어내고 있다.' -또렷해지는 죽음의 발자국- 중에서

'차라리 아버지가 정신을 놓았으면 좋겠다. 고통도 모르고 되새김할 이야기가 없어도 심심하지 않을 그런 상태가 되었으면 좋겠다. 짐승같이 묶여 있는 아버지를 보는 것은 고통이다.' -차라리 의식이 없는 것이 낫겠다-중에서.

'아버지를 중환자실로 옮겨 집중 치료했으나 폐는 빨리 좋아지지 않았다. 주치의 교수는 조심스럽게 아버지한테 기관 절개술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해왔다. 무척 고민을 했다. 내가 내 환자들에게 거리낌없이 권유하던 수술이다. …. 수술은 간단합니다. 지금 기관에 삽관되어 있는 기관내사입관은 더 이상 두기 곤란합니다. 오래두면 협착이 옵니다. …. 내 환자들한테 수술을 권유하면서 설명하던 내용이다.' -희미한 응얼거림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중에서.

'나는 어려서 자주 아팠다. 불덩이 같은 나를 업고 아버지는 새벽에 5리 떨어진 조그만 의원으로 달려가 주사를 맞혔다. 그리고 5리 떨어진 집으로 빠른 걸음으로 돌아오셨다. 잠이 들었던 나는 아버지 등에 오줌을 쌌다. 아랫도리가 훈훈해지는 느낌에 잠을 깼지만 미안하고 창피해서 잠든 척 했다. 그때 아버지는 이 놈이 오줌을 싼 게로구먼, 이라고 혼자 중얼거리셨다. …. 앰뷸런스 속에서 주무시던 아버지가 오줌을 지렸다. 사타구니 주위는 물기가 흥건하다. 나는 이불을 끌어당겨 아버지의 얼굴까지 포근히 덮어 드렸다.' -아버지 등에 업혀 잠든 척 하던 그날처럼- 중에서.

임만빈의 이번 수필집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사적인 영역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사적인 병상 일기에 머물지 않는다. 지은이는 지극히 일차적이고 구체적인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인간의 보편적인 삶과 죽음, 자식의 심정, 인생과 의료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243쪽, 1만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