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웃겨줬는데 감동까지 바라는거야?…'7급 공무원'

극장에 제법 들락거렸다는 한 지인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극장을 나서는 관객 표정이나 걸음걸이를 보면 어떤 영화를 보고 나왔는지 십중팔구는 맞힌다." 성냥개비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쌍권총을 난사하는 '영웅본색'을 본 관객과 이뤄질 수 없는 애틋한 사랑을 흐르는 빗줄기 속에 떠나 보낸 '메디슨카운티의 다리'를 보고 나온 관객 표정이 같을 리 없다. 지난해 대박을 터뜨렸던 코믹 영화 '과속스캔들'을 보고 난 관객들은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고, 극장문을 나오기 무섭게 개성 만점 주인공들에 대한 이야기를 속사포처럼 쏘아댔다. 영화 '7급 공무원'을 본 관객들은 어땠을까? 극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올 때 한 커플이 나눈 대화. 남자 왈 "영화 재밌네!", 여자 왈 "그렇네. 생각보다 재밌네." 그렇다. 재미있는 영화였다. 그런데…. 그게 전부다. "코믹 영화에서 뭘 더 바래?"라고 말하는 듯 하다.

◆속이는 게 임무, 감추는 게 직업

영화에 대한 소개글에서 '끝내 폭발하지 못한 폭탄'이라는 표현을 봤다. 아주 적절한 수식어다. 처음부터 끝까지 웃기려고 작정했고, 잠시 쉬는 틈을 주는가 싶더니 그 새를 참지 못하고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하지만 '푸하하' 식의 웃음과 '크흐흐' 식의 웃음은 다르다. 울다가 웃으면 뭐가 난다고 하지만 한국 관객들은 그런 웃음을 선호한다. 영화 막바지에 여주인공은 남자 친구가 자신과 같은 정보원임을 알고난 뒤 이렇게 말한다. "내가 위험한 일 하지 말랬지. 왜 그렇게 말을 안듣니?" 아마 코끝이 살짝 찡한 먹먹함 속에, 상황이 빚어내는 웃음 코드를 집어넣으려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끝내 폭탄은 터지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2% 부족함을 느끼게 한다. '푸하하'도 아니고 울다가 웃으며 꺼이꺼이 넘어가는 폭발력도 갖추지 못했다. 112분 내내 '크흐흐'하며 웃기에는 충분하지만.

영화 줄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웃음 코드를 끌고가는 엔진 역할에 충실했을 뿐 복잡하게 얽히고 설키는 구조는 포기했다. 서로 신분을 숨긴 국가정보원 소속의 남자와 여자가 나중에 신분을 알게 되고, 그러기까지 벌어지는 좌충우돌이 이야기의 전부다. 생화학 무기를 판매하려는 박사와 이를 몰래 사려는 러시아 첩보원의 어설픈 접선 장면도 큰 줄기를 떠받쳐주는 조수 역할에 그쳤다.

아무튼 영화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여행사 직원으로 위장한 경력 6년차의 국가정보원 요원 안수지(김하늘). 과거는 밝혀도 정체만은 밝힐 수 없는 직업 특성상 남자 친구인 이재준(강지환)에게 거짓말을 밥 먹듯 하다 일방적인 이별을 통보 받는다. 말도 없이 떠나버린 재준에 대한 서운함과 괘씸함에 몸부림 치던 수지. 3년 뒤 청소부로 위장한 채 산업 스파이를 쫓던 중 재준과 우연히 다시 마주친다. 자칭 '국제 회계사'가 돼 나타난 재준을 보며 조금씩 마음이 흔들린다. 재준 역시 신분을 위장한 국가정보원 해외 담당 요원이다. 아직은 실수 투성이인 신참 요원이지만 의욕만은 조국을 수십번 살리고도 남는다. 작전 중 수지와 자꾸 부딪히며 일은 꼬여만 간다.

◆맛깔스런 대사가 재미를 한층 더해

영화는 고전적 코믹 요소를 그대로 따랐다. 하지만 톡톡 튀는 대사만큼은 인정할 만 하다. 극중 수지의 엉뚱한 상사로 나오는 홍 팀장(장영남)의 맛깔스런 대사는 자칫 진부할 뻔한 영화의 맥을 살려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수지가 맞선을 본 남자가 홀어머니에 시누이가 두 명이나 된다는 말에 당장 헤어질 것을 종용하다가 결혼한 시누이들이 해외로 이민갔고 홀어머니는 대기업 오너라는 말을 듣고는 절대 놓치지 말라고 능청스레 부추긴다. 재준이 속한 팀의 과장으로 나오는 원석(류승룡)의 대사는 쫄깃쫄깃하다. "원래 여자는 두 가지야. 믿기지 않거나 믿을 수 없거나." 여성을 비하하거나 깔보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오히려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여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남자의 속성을 빗댄 말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터. 극중 수지가 바로 믿기지도, 믿을 수도 없는 여자다.

수지는 어떤가? 재준과 극적인 화해를 하고 침대에서 한바탕 뒹굴고 난 뒤(아니면 뒹구려고 하던 찰나), 작전 명령을 받은 재준이 가봐야겠다고 겸연쩍게 말하자 수지는 "중요한 게 급해, 급한 게 중요해?"라고 악다구니를 치지만 자신도 작전 명령을 받게 되자 능청스레 "급한 게 중요하지"라며 재준의 바지를 입혀준다. 작전 중이라는 이유로 틈만 나면 상사에게 반말을 지껄이는 재준과 그런 재준의 태도에 반응하는 원석의 대사는 영화를 보다 찰지게 만들었다. 영화 속에는 말장난도 심심찮게 나온다. 재준이 활동하는 국정원 비밀요원팀의 이름은 '하리마오'. 영화에서는 홀로 사냥을 하는 호랑이 중의 호랑이를 하리마오라고 부른다고 설명한다. 이들 하리마오팀의 외부 활동 명칭은 '보국냉동유통'. 냉동탑차가 이들 팀이 이동하는 운송 수단이고, 작전 본부는 허름한 냉동 창고다. '얼리지 않은 냉동 고기'라는 간판은 슬쩍 지나가지만 묘한 웃음을 남기게 한다. 하기야 이런 간판이 한둘인가. 횟집마다 '자연산'이 넘쳐나고, '유기농'과 '폭탄 세일'은 감동없는 수식어가 됐다. 영화를 본 뒤 늘 굳게 닫혀있는 간판뿐인 가게를 다시 보게 됐다. 국정원 사무실이 아닐까?

신태라 감독의 전작은 '검은 집'(2007년). 영화 속 재준의 친구는 비디오 대여점을 한다. 이곳을 찾은 재준이 들어보이는 DVD는 다름 아닌 '검은 집'. 속 보인다고 욕할 것 없다. 이것 역시 웃자고 집어넣은 장면일 뿐이다. 오랜만에 찾아온 코믹 영화라는 장점 때문인지 '7급 공무원'은 초기 반응이 상당히 좋은 편. 영화가 뒷심을 발휘해서 지난해 '과속스캔들'처럼 대박의 대열에 진입할 지는 아직 미지수다. 가뜩이나 어려운 시기에 그저 한바탕 웃고 나올 영화를 찾는다면 딱 좋은 작품. 다만 지나친 기대심은 금물이다. 편안하게 앉아서 팝콘을 씹어대며 실컷 웃다가 나오면 그만이다. 어리버리 강지환과 깜찍한 김하늘을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는 충분하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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