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내 곁에 선 순간, 그 눈빛이 너무 좋아.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때문에 내일은 행복할거야~.'
심수봉의 '사랑밖엔 난 몰라'는 제목부터 사람의 간장을 녹인다. 난 아무것도 몰라, 사랑밖에 난 아무것도 몰라. 얼굴도 무엇도 아닌, 부드러운 사랑만이 필요했던 한 여인이 그 남자의 커다란 어깨 위에 기대어 힘들었던 지난 세월을 모두 잊어버리려고 한다. 그것이 꿈이다. 어깨 위에 기대고 싶은 꿈을 깨지 말았으면. 무심히 버려진 날 위해 울어주던 그 사람만은 이 꿈을 깨지 말았으면. 서러운 세월만큼 안아줬으면. 어깨에 기대면서도 그리운 바람처럼 사라질까봐 또 그렇게 혼잣말을 한다. 사랑밖엔 난 몰라.
이처럼 가련하게, 간절하게, 애타게 사랑을 노래한 것이 있을까. 너무나 서러워 이 노래만 들으면 눈물이 날 지경이다.
사실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년)를 보고 금방 일어설 수 없었던 것도 이 노래의 눈물자국 때문이었다. 맥주 냄새가 진동하는 시골 도시 한 모퉁이의 지하 나이트클럽. 중년 남녀들의 사교장에서 인혜(오지혜)는 아련한 젊은 시절의 꿈과 사랑을 그리며, 이제는 서러운 길만 남은 채 부서져가는 인생을 이 한 곡에 모아 노래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공간은 충주의 한 나이트클럽이다. 서울에서 밀려나 주변부 인생을 살아가는 한 4인조 밴드의 꿈과 이상, 그리고 현실을 아련하게 그리고 있다. '와이키키'를 꿈꾸는 밴드 이름에서 벌써 쫓아갈 수 없는 현실의 벽이 느껴진다.
이들은 불경기로 출장 밴드를 전전한다. 시골 노인의 칠순 잔치에서 '칠갑산'을 부르거나, 영양 고추아가씨 선발대회에서 연주하기도 한다. 팀의 리더인 성우(이얼)는 고교 졸업 후 한번도 찾지 않았던 고향에 내려온다. 한때 고교 시절 밴드를 하며 꿈을 키웠던 친구들을 찾지만 그들은 이미 생활에 찌들어 있다.
수안보 와이키키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일자리를 얻어 연주를 시작한다. 그러나 단원들은 늘 말썽만 일으킨다. 오르간 주자 정석(박원상)은 여자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고, 드럼을 치는 강수(황정민)는 마약에 취해 연주를 망치기도 한다. 하나 둘 떠나면서 이제 성우 혼자만 남아 고단한 음악을 이어간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잃어버린 꿈에 대한 이야기다. 1980년 대학가요제에 나온 로커스트의 '하늘색 꿈'과 같은 이미지를 그려낸다. 세상사에 시달려가며 자꾸 흐려지는 내 눈을 보며 이미 지나버린 나의 어린 시절 꿈을 생각하게 한다. 어른이 되어도 하늘빛 고운 눈망울을 간직하리라던 그 꿈 말이다.
우리 가요의 가사가 주옥같다는 느낌을 간혹 받는다. 이 영화에서도 노래는 주인공들의 심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성우의 늙은 기타 선생은 낡은 여인숙 방에서 손박자를 치며 '봄비 속에 떠난 사람, 봄비 맞으며 돌아왔네'를 노래한다. 봄비의 풋풋함처럼 그 시절을 그리는 마음이었을까. 지금은 채소 장사를 하지만 인혜도 고교 시절 성우의 마음을 흔들었던 로커였다. 고교 밴드 경연대회에서 조안 제트의 'I love Rock'n Roll'을 열창했다. 그러나 이제 채소 배달을 끝내고 혼자 노래방에서 우순실의 '잊혀지지 않아요'를 부르는 인혜의 모습은 참으로 쓸쓸하다. 퇴색된 흑백사진 속의 자신을 보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고교시절 성우(박해일) 또한 '세상만사 모든 일이 뜻대로야 되겠소만, 그런대로 한 세상 이러구러 살아가오'('세상만사')를 목청껏 불렀고, '불놀이야' 등 뜨거워 주체할 수 없는 젊은 청춘의 꿈을 갈구했다.
꿈과 현실의 벽을 가장 서글프게 그린 것이 혼자 남은 성우가 노래방에서 반주하는 장면이다. 발가벗고 춤추는 취객들의 강요에 그도 옷을 벗고 기타를 연주한다. 모니터에는 비키니의 여인이 해변을 관능적으로 뛰고 있다. 그러나 성우의 눈은 젖어 있다. 비키니 여인 위로 알몸으로 해변을 질주하던 네 명의 남자 아이들이 떠오른다. 꿈 많은 학창시절의 그들이다.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그 꿈들은…. 이 작은 모니터 속에 갇힌 걸까. 임순례 감독은 꿈과 현실을 이 작은 모니터 속에 기가 막히게 그려주고 있다.
그럼에도 임순례 감독은 마지막 장면에서 희망을 건져주고 있다. 성우는 인혜와 함께 해변의 작은 도시에서 새로 일을 시작한다. 몸이 불편한 정석 또한 오르간을 다시 잡았다.
캄캄한 무대에 빛이 들어온다. 인혜가 빛나는 무대복을 입고 마이크를 잡았다. 찬찬히 흘러나오는 반주에 맞춰 노래를 시작한다. '사랑밖엔 난 몰라'이다. 1절을 다 부를 동안 카메라는 꼼짝을 하지 않고 그들을 비춘다.
그리고 서서히 카메라가 뒤로 빠진다. 남녀들이 모여 춤을 추고 있다. 많지는 않다. '무심히 버려진 날 위해, 울어주던 단 한 사람, 커다란~.' 인혜의 노래는 계속된다.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난다.
현실에 꿈을 내어주지 않은 성우, 인혜, 정석. 노래 속 어느 여인처럼 그들은 '당신 아닌 그 무엇도 이젠 할 수 없어. 사랑밖엔 난 몰라'를 속으로 따라 부르면서 꿈을 가꿔간다. 그들의 모습은 어쩌면 꿈을 이룬 이들보다 더 아름다울지 모른다.
김중기 객원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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