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노스님 병수발이 수행" 報恩실천 대륜사 덕신 스님

▲ 덕신 스님이 이 자그만 절에 오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몸져 누워 있는 묘신혜안 스님은 한사코 사진 찍는 것을 거부했다.
▲ 덕신 스님이 이 자그만 절에 오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몸져 누워 있는 묘신혜안 스님은 한사코 사진 찍는 것을 거부했다.
▲ 기도하는 덕신 스님.
▲ 기도하는 덕신 스님.

보은(報恩) 즉 '은혜를 갚음'은 너무 당연한 불가(佛家)의 이치다. 어떤 사람으로부터 내가 어려울 때 긴요한 도움을 받았으니, 이를 갚으려는 것은 인간의 선한 본성이다. 하물며 금수(禽獸)도 인간으로부터 은혜를 입으면 온몸을 던져 갚는다는 설화나 속담, 우화도 적잖다. 그래서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경우를 욕할 때 '금수만도 못한 놈'이라고 부른다.

현 시대를 살아가며 누군가에게 은혜를 갚는다는 것은 결코 쉽잖다. 각자 사회에서 맡은 일도 있을 뿐더러 많은 부분을 포기하면서까지 보은하는 것은 어려운 결단이 있어야 가능하다. 특히 복잡하게 얽힌 관계 속에서 가족, 친척, 친구, 직장동료 등을 잠시 뒤로 한 채 누군가에게 은혜를 갚는 데 많은 희생을 치른다는 것은 더 힘들다. 그렇다. 이런 사례도 잘 없다. '보은'은 어렵사리 찾을 수 있는 세상 가치가 되어버린 것.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팔공산 아래 한 작은 절에서 5년째 보은을 실천하고 있는 스님을 찾았다. 40년 전 출가해 행자 생활을 할 때 자신을 도왔던 노스님이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만행(萬行·세상을 다니면서 불교도나 수행자들이 지켜야 할 여러 가지 행동을 익히는 것)을 그만두고, 5년째 병 수발을 들고 있는 '대륜사' 덕신(德信·54) 스님.

조계종 총무원 총무국장까지 지냈던 속된 말로 '잘나가던' 사판(事判·절의 모든 재물과 사무를 맡아 처리) 스님이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이곳에 머무는 이유는 단순했다. 묘신혜안(74) 스님의 건강 보살핌과 이를 통한 자신의 수행정진이었다. 노스님을 모시는 것이 힘들어질 때는 '이런 것도 이겨내지 못하는 내가 만행을 계속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고 다시 자신을 다잡는다. 28일 팔공산 아래 작은 동네에 있는 '대륜사'라는 작은 절을 찾아가 어렵사리 덕신 스님을 만났다.

◆아름다운 보은

묘신혜안 스님은 덕신 스님이 있어 이렇게 살아있다고 했다.

"5년 동안 날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줬다.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도 다 이 스님 덕이야. '힘들면 떠나라'고 그렇게 호통쳤고, 다른 유명한 사찰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와도 가지 않고 곁에 있어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사실 그동안 그 고마움을 표현조차 않았다."

비구니의 병 수발을 들고 있는 덕신 스님은 힘들 만도 할 텐데 평온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지금 앓아누운 묘신혜안 스님을 위해 힘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게 세상 어떤 다른 가치보다 앞서 있기 때문.

40년 전 인연은 그 자체로 인연일 뿐인데 40년 후 덕신 스님이 이곳에 머무는 시간은 아름답게 승화되고 있었다. 요즘 세속의 시선으로 보아도 그는 자신의 어머니보다 더 소중하게 노스님을 모시고 있다.

덕신 스님과 5년 동안 인연을 가져온 양수용(52) 대구 봉산문화회관장은 "자신의 부모라 한들 이처럼 불평없이 온갖 궂은 일 다해가며 잘 모실 수 있을까. 요즘 사람들이 이곳에서 많이 배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두 스님은 1969년 계룡산 신원사에서 처음 만났다. 이때 덕신 스님은 갓 출가해 행자생활을 하고 있었고, 비구니인 묘신혜안 스님은 그가 올바른 스님으로 커가는 데 정신적·물질적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초등학교만 졸업한 덕신 스님은 이후 검정고시를 거쳐 법주사 승가대학, 동국대 불교대학 선학과를 졸업했다.

묘신혜안 스님은 그저 멀리서 지켜보며 흐뭇해했다. 하지만 6년 전 심장수술을 받고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고, 덕신 스님과의 보은의 인연이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묘신혜안 스님이 머무는 방 안은 후끈할 정도로 더웠다. 묘신혜안 스님이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기 때문에 날씨가 더운 날에도 온돌방의 온도를 높여서다. 그런데도 덕신 스님은 땀을 뻘뻘 흘려가며 묘신혜안 스님의 손발을 주무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원관리, 사회봉사도 척척

덕신 스님은 이곳에 5년간 머무르면서 매일 절 앞의 작은 정원을 가꾼다. 꽃씨를 뿌리고 주변에 잡초를 정리할 뿐 아니라 불상, 불교 관련 소도구 등을 정원에 잘 배치에 보기만 해도 소담스런 분위기를 느끼도록 했다.

그는 "작지만 이곳에서 꽃이 피고 지고 또 봄이 되면 새순이 나는 것을 보면서 세상 이치도 깨닫게 된다"고 했다.

그는 또 폐지를 주우러 다닌다. 산속 절이 아니기 때문에 주변 주택가를 돌며 박스나 종이를 하루종일 주워 고물상에 팔아 많으면 1만5천원, 적으면 1만원 정도를 받는다. 그러면 그 돈은 주변 경로당이나 어려운 이웃의 간식거리가 된다. 모인 돈으로 떡, 순대, 빵 등을 사서 나눠주고, 그것을 자신의 작은 행복으로 여긴다. 덕신 스님은 폐지 주우러 나갈 때도 묘신혜안 스님의 허락을 받고 나간다.

운전기사로도 그는 '베스트'다. 묘신혜안 스님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강원도나 전라도로 기도하러 가자고 하면 그는 곧바로 준비에 들어간다. 이때 중요한 것은 도착할 때까지 4시간이 걸리든 5시간이 걸리든 쉬지를 못한다. 묘신혜안 스님은 기도하러 갈 때는 마음을 하나로 수행정진하기 때문에 먹는 것도 힘든 기도를 끝내고 돌아와야만 먹을 수 있다. 그는 "이 때문에 운전을 하다 졸음이 올 때는 허벅지를 쥐어뜯으며 잠을 깨 운전을 한다"고 했다.

◆보은이자 나의 수행과정

"저는 서울에서 나 1969년 출가했고, 동국대를 졸업한 뒤 조계종 총무원으로 들어가 행정업무를 봤습니다. 이후 2002년까지 사판승의 길을 걸었습니다. 포교, 사회, 문화, 총무국장 등 총무원 행정업무는 안 해 본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활을 하는 동안 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 그 일을 그만두고 정처없이 전국을 떠돌며 수행하는 만행의 길을 걸었습니다. 무일푼으로 나와 강원도, 경상도에서 절이나 민가를 돌며 온갖 행상을 다 겪었습니다. 잠잘 곳이 없어 길바닥에서 잔 날도 허다했습니다. 그러다 이곳 팔공산 자락 아래 대륜사에 계신 묘신혜안 스님이 아프다는 것을 알게 됐고, 만행을 접었습니다. 이곳에서 은혜를 입었던 스님께 보은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부처님이 제게 주신 수행과정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덕신 스님은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배경에 대해 길게 얘기했다. 특히 묘신혜안 스님은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덕신 스님이 단 한순간도 '마음이 콩밭에 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묘신혜안 스님은 너무 직설적이어서 허튼 생각을 하면 그 자리에서 불호령을 내리고, 직접 회초리를 들어 크게 나무라신다. 어떨 때는 덕신 스님이 참기 힘들 정도로 욕을 하기도 하고 몸에 생채기를 낸 적도 있다.

그는 "나도 사람인지라 정말 힘이 들 때는 이곳을 뛰쳐나가고 싶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묘신혜안 스님이 저를 더 크게 하시기 위해 담금질하는 과정으로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덕신 스님과의 일문일답.

-조계종 총무원에서의 생활은.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자마자 총무원 포교국장 3년, 사회국장 3년, 문화국장 4년, 총무국장 2년 등 행정업무에 전념해 오로지 일만 하며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서의현 총무원장이었고, 다음에는 탄성, 월주, 고산, 정대 총무원장 등 총무원장만 다섯 분을 모셨습니다. 가장 보람된 일은 제가 문화 쪽에 관심이 많아 우리의 좋은 불교문화를 널리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입니다."

-묘신혜안 스님과의 만남은.

"정확히 40년 전 계룡산 신원사에서 뵈었는데, 첫 만남에서 큰 인연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묘신혜안 스님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음에도 제 일에만 바빴지 주변을 돌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고마움은 항상 마음속에 간직했고 수시로 연락을 하면서 '정신적인 주지'로 모시고 있었습니다. 묘신혜안 스님이 너무 솔직하고 아기 같은 순수한 마음이 있어 제가 수행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죠. 대신 잘못했을 때는 너무 혹독하죠."

-지난 5년 동안 다른 절에서 부름이 없었습니까.

"월정사, 낙산사, 직지사, 대흥사 등 큰 절에서 교육원장으로 와 달라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곳 큰 절에서 불자들에게 강의도 하고 행정업무도 봐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 묘신혜안 스님을 모시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은 단지 유혹일 뿐입니다. 쉽게 뿌리칠 수 있습니다. 제가 어려울 때 도움받은 분이 편찮으신데 이를 돕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을까 생각합니다."

-묘신혜안 스님과 주로 어디로 기도를 갑니까.

"강원도, 전라도 등 큰 절, 작은 절 가리지 않고 다닙니다. 낙산사, 월정사, 법흥사, 상원사, 정암사 등 당일치기가 많고 1박 2일로 갈 때도 있습니다. 아침에 가서 밤에 돌아오는데 묘신혜안 스님은 차 안에서 기도를 계속합니다. 그 때문에 휴게소에서 쉬는 법도 없고, 중간에 다른 음식도 먹지 않습니다. 졸릴 때도 스님은 '졸려서 사고나서 죽으면 같이 죽는 것. 기도하다 죽으면 얼마나 좋으냐'고 수행자세를 다그치십니다."

-얼마나 계실 계획인지.

"스님이 건강을 되찾거나 아니면 입적하실 때가 될 수도 있지요. 제가 곁에서 도움이 된다면 묘신혜안 스님이 아무리 절 떠나라고 해도 떠나지 않을 겁니다."

글·사진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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