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노동일의 대학과 책] 인류와 전염병의 운명적 만남

윌리엄 맥닐 지음/김우영 옮김, '전염병의 세계사'(이산, 2005)

'인플루엔자A'라는 전염병이 창궐하였습니다. 발생 진원지인 멕시코를 비롯한 북미 지역에서는 이미 수백명의 감염자가 사망하였고, 세계 곳곳으로 확산되고 있어서 당분간 사망자 수가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 안타까운 일입니다. 전 인류가 머리를 맞대고 치료약 개발에 골몰하고 있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등장한 변종 인플루엔자여서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사람 간 접촉을 통해서 전염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격리를 통한 감염 경로의 차단만이 유일한 대응 방법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먹이사슬의 정상을 차지한 인류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세균에게 농락당하는 상황입니다. 집단화와 교류의 활성화를 무기로 진화를 거듭해왔던 인류를 움츠리게 하고, 교류 단절을 강압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의 영역에 도전한다고 바벨탑을 쌓던 인간 존재의 허상을 비웃는 것이며, 인간 역사를 거꾸로 돌리라는 주문입니다.

돌이켜보면 역사 이래 인간 집단은 낯선 전염병의 출현으로 수시로 생멸의 위기를 맞곤 했습니다. 14세기 흑사병, 19세기 콜레라, 최근 중국에서 발생한 사스(SARS)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이 써온 인간 중심의 역사는 착오이거나 오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상 패권을 차지한 국가들이 대부분 기술력을 바탕으로 막강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라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스페인이 600명도 채 되지 않은 병사로 인구 수백만의 아스텍 제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력이 아니라 유럽에서 옮아간 천연두였습니다. 유럽의 중세를 종식시킨 것도 흑사병이었고, 미국이 파나마운하를 차지하고 세계 제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도 말라리아와 황열병 덕분이었습니다. 파나마운하에 탐을 낸 프랑스가 1881년부터 인부들을 동원하여 파나마 진출을 시도했지만 말라리아와 황열병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반면 미국은 이들 전염병을 매개하는 모기의 수와 행동 양식을 관찰하면서 꼼꼼하고 적극적인 위생 사업을 벌인 덕분에 황열병을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미국이 세계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모기와의 전쟁, 전염병과의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적정한 시기에 가장 귀기울여 들어야 할 전염병에 대한 이 이야기들은 김우영님이 옮긴 윌리엄 맥닐(William H. McNeill)의 '전염병의 세계사'(이산, 2005)에서 탐독할 수 있습니다. 윌리엄 맥닐 교수는 현재 시카고대학 역사학과 명예교수이며, 우리 시대의 가장 빼어난 역사가로 평가받고 있는 분입니다. 그는 전염병을 중심으로 인류 역사의 재해석을 시도하였습니다. 전염병을 인류에게 재앙을 초래하는 돌발적이고 일회적인 우연한 사건으로 보지 않고 교역망의 확대, 생활 환경의 변화, 생태계의 교란, 정치적 및 경제적 상황, 인구 동태 등 인간사의 총체적인 측면과 맞물려 있는 중요한 변수로 다루고 있습니다. 전염병이 인간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콜레라와 페스트가 발생했을 때 사회가 위기에 처했지만 덕분에 상하수도 체계를 개선, 식수를 끓여 마시는 관행 도입 등으로 위생 수준 및 수질 관리가 향상되었습니다. 감염 방지를 위해 사회 간 단절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도시화를 촉진하고 국제협력을 강화하게 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1831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럽 열강의 영사들을 중심으로 콜레라와 페스트를 막기 위한 보건위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그 후 이 위원회는 서유럽 보건행정의 전초기지가 되었고, 메카 순례자들의 역학적 운명을 추적하고 이집트에서 위험한 질병이 출몰할 때면 그에 관한 정보를 유럽에 제공하였습니다. 1883년 무렵 이집트에서 콜레라가 발병하였을 때 이 협력 기제는 확실한 효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유럽 각국의 의사단이 현장에 급파되고, 불과 몇 주일 만에 독일의 로베르트 코흐에 의해 콜레라균이 발견되었습니다. 감염원이 밝혀지자 예방법도 분명해졌고, 1893년 콜레라 백신이 개발되게 됩니다. 위기는 곧 기회입니다. 그러나 위기를 준비하고 위기에 겸손해야만 기회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전염병에 대한 인간의 오만을 지적한 윌리엄 맥닐 교수의 결론입니다. "가까운 과거에 그랬듯이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 인류는 엄청난 생태적 격변을 맞을 것이다."

노동일(경북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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