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상선에 조그만 혹이 생겨 절제 수술을 받았다. 병변은 작았지만 '악성'이라는 진단 때문에 가족을 포함한 지인들의 과도한 보살핌과 사랑 속에 수술과 휴식기간을 보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예기치 않은 함정을 만났을 때 여러 가지로 반응할 수 있지만 가장 수지맞는 대응은 '감사와 합리화'라는 평소의 원칙이 있었다. 그래서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감사와 축복의 조건을 찾아보기로 했다.
지인의 병문안으로 우연히 검사를 하게 돼 눈부신 의학의 발전으로 콩알보다 작은 암덩어리를 찾아낼 수 있어 감사했다. 또 조기 발견이라 전이 없이 얌전히 자리 잡아 방사선, 화학약물 요법 없이 단순 절제만으로 완치한 데 대해, 이제까지 무심했던 육체에 대한 관심과 보살핌을 결단하는 기회를 가진 데 대해 감사했다.
살아오면서 만난 여러 순간들이 저장된 뇌창고의 기억 파일 가운데서 이번에는 박세리의 US여자오픈결승전에서 보여준 한 장면이 떠오른다. '해저드' 신화라고 불리는 맨발의 스윙 장면이다. 골프공이 해저드에 빠졌을 때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이나 당황함 없이 마치 각본에 있는 드라마의 한 장면을 연출하듯 담담히 양말을 벗고 물속에 들어가 공을 쳐 올렸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도 해저드에 빠진 공처럼 난감한 상황을 만날 수 있으며 그럴 때는 원망도 후회도 미련도 없이 우선 상황을 받아들이고 양말을 벗듯 해결책을 찾아내야 한다.
그럴 때 가장 효과적인 메커니즘은 감사와 합리화이다. 부정적이고 음성적인 감성으로는 기쁨이나 치유, 행복 등의 창조적인 확대 재생산의 결과를 결코 맛볼 수 없기 때문이다.
퇴원하여 휴식 기간도 지나고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우려 속에 첫 출근, 진료를 하는데 핸드폰에 문자 한 통이 들어온다. 동기간처럼 허물없이 지내는 후배의 익살스런 문자다. 암환자에서 정상인으로 생환한 기념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일년에 서너번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만나 계절 안부를 묻거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이 모임에는 이비인후과 의사가 두 사람 있는데 이들의 진료 철학은 '목 수술 후에는 신의 물방울로 세척, 관통식을 해야 치료가 종결된다'는 것으로, 납득이 잘 안 간다. 이 같은 철학이자 처방을 제시하면서 모임을 청한다.
그날 밤 거사를 실행하는 의사(義士)처럼 결연한 얼굴로 각자 와인 한 병씩을 손에 들고 집으로 찾아온 것이다.
와인은 머리로 마시는 것이 아니라 혀끝이라지만 와인에 얽힌 사연들을 알면 배로 즐길 수 있다. 헤밍웨이가 너무나도 사랑하여 손녀에게도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프랑스의 루이15세가 애인 뒤바리와 마셨다는 로맨틱한 와인 샤또 마고나 영국 여왕 에리자베스 결혼식 때 나와 알려지면서 케네디 가문, 오나시스, 록펠레 등이 애주했다는 샤또 페트뤼스는 고가인지라 머리로만 음미하고 다음날을 기약한다.
언제나 유쾌하게 분위기를 주도하는 한 이비인후과 선생님은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비의 결혼식 때 기념주였던 샴페인 볼랭저를 들고 와서 "우리도 지금부터는 영국 왕족처럼 우아하고 고귀하게 인생을 즐기자"고 건배를 제의한다. 그 다음에는 히딩크가 좋아했다는 와인 딸보를 내놓으며 프랑스와 100년전쟁 당시 잔다르크의 용맹에 퇴각한 영국 장군 딸보의 인간적인 고뇌도 안주처럼 화제의 대상에 오른다.
이렇게 밤이 깊어가며 또 하나의 감사 제목이 떠오른다. 인생의 한 고비를 넘기고 사랑하는 친구들과 넉넉하게 신의 물방울을 섭렵할 수 있는 것도 축복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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