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영동의 전시 찍어보기] 행위와 재료에 의한 표현

권오봉 전 / 이안갤러리 / ~5.16.

고전주의 천재들이나 거장들의 작품들이 듣던 최고의 찬사 가운데 하나는 신의 창조물인 자연에 버금가는 완벽성을 달성했다는 것이었다. 마치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뺄 것이 없는 무결한 것처럼 이상화되었던 고전에 대한 생각은 그림이 공간이나 깊이의 재현과 관련되었던 시대의 주된 관념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 예술 작품의 완전성에 대한 이런 식의 이해는 바뀌었다. 더구나 물감을 튀기거나 흘린 흔적과 얼룩들의 오점들로 가득한 현대 미술의 평면을 두고는 아무도 더 이상 그런 생각을 안 한다. 오늘날의 미술은 문제 해결의 결과물이란 인식보다는 계속되는 과정의 일부란 인상을 더 준다. 연속적인 추구의 일면이면서 끝없는 도전에서 파생한 단편들처럼 여긴다. 그래서 모더니스트들의 작품은 성취나 결실이란 말보다 탐색이나 실험이란 단어가 더 잘 어울린다.

권오봉의 작품전은 채색이 배제된 단색조의 배경에 격정적인 선의 소용돌이와 군데군데 커다란 물감 얼룩들이 가득한 화면이 시야를 압도한다. 흑백 두 가지 색만으로 펼쳐지는 선의 변주들은 서예나 수묵 같은 동양 미학의 세계를 일견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그러기에는 낙서처럼 보이는 필선이 너무 혼란스럽고 물감의 투척 자국들이 당혹스럽다. 굳이 추상표현주의자들의 타입과 비교하자면 그 차이는 분명하다. 프란츠 클라인의 제스처보다는 덜 서체적인 모양새를 띠고 구성이 더 자유롭다. 사이 톰블리의 즉흥성과 섬세함에 비하면 훨씬 더 강렬하다. 역동적인 면에서 잭슨 폴록이나 윌렘 데 쿠닝의 화면만큼 화려하진 않아도 복잡한 얽힘은 힘에 넘친다. 덧칠된 검은 물감 반죽들이 좀 더 치명적인 엄숙함을 자아낸다.

다시 보면 그의 그림들은 즉각적이고 활달한 필치, 던져 쏟은 듯 흐르는 물감 자체의 표현성 등 화면의 표층 위에서 읽을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어떤 묘사적인 형태도 아무 상징적인 형상도 아니고 다만 행위의 흔적으로만 보인다는 점에서 재료 그 자체(material truth)이며 그래서 순수하고 자족적이고 절대적인 회화의 전형이다.

바닥 면은 색의 절제와 함께 귀얄붓질로 쓴 흔적이 미묘한 변화로 드러난다. 그 위의 선들은 부드러운 붓 대신 사용한 도구로 간결하고 선명하다. 율동적이고 속도감 있는 손놀림은 애매한 정서의 주관성을 전달하지만 자신감에 차 있어 오히려 객관적으로 보이게 한다. 무의식에서 길어 올린 잠재력과 우연에 의존하는 것은 분명 내향적인데 선을 긋고 물감을 적용할 때의 머뭇거리지않고 거침없는 자세가 돋보인다. 비의도적이면서도 행위의 순간에 취한 그런 결단력 있는 동작 덕분에 잠재된 힘이 확고한 표현으로 떠오른다.

개인의 내면과 극단적인 주관성이 반영된 그림이지만 표현의 유형들이 지닌 보편적 성격은 회화의 방법들로 하여금 말을 시킨다. 아마 이런 점이 질리게 하지 않으면서 그의 그림을 보는 눈길을 더 오래 붙잡아두고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그 속에서 읽게 하는 것 같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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