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내가 학생이었을 때, 대구 근교의 봄은 참으로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중동에서 수성못, 지산동에 이르는 그 넓은 천지는 모두 봄에는 보리밭, 여름에는 논이었다. 들판에 서면 초록의 새로운 천지가 열렸다.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무대라고 하는 옛 대륜학교 뒤쪽 역시 모두 종달새 노래하는 보리밭이었다. 이제는 우악스런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서 정말 '빼앗긴 봄'이 되어 버렸다.
안지랑이라는 이름도 예쁜 골짜기의 봄은 아늑한 고향 같았다. 연한 초록색 풀과 나뭇잎의 싱싱함, 연분홍 진달래꽃, 노란 생강나무꽃의 짙은 향기. 그리고 청보리밭에서는 종달새가 지저귀고 먼산에는 꿩이 울고, 아지랑이가 아롱거렸다.
이렇게 봄은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우리의 모든 감각의 문을 두드렸다. 마을마다 집집마다 살구꽃, 목련, 개나리가 피어 나의 고향은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였다. 봄비라도 내릴라치면 풀잎에 맺힌 물방울의 애처로움은 무언가 아련한 그리움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제 봄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 봄이 와도 봄 같지 않은 봄, 봄인가 했더니 어느새 여름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봄은 봄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짧은 봄을 그냥 보낼 수는 없다.
훈훈한 봄바람이 부는 날 혼자 혹은 어울려 낮은 소리로 이야기하며 오솔길을 느릿느릿 걸어보자. 그냥 걷지만 말고 겸허하게 몸을 낮추어 길가에 피어있는 수줍어하는 꽃, 잘난 척하는 꽃, 이름을 알 수 없는 풀꽃들을 바라보며. 가까이서 들려오는 종달새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꿩 소리를 들으며. 가다가 가다가 숲 속의 빈 의자에 앉아 들리는 소리만 듣지 말고 들리지 않는 소리도 들어보자. 안개 낀 아침, 머리만 내놓고 서 있는 나무들의 고독을 바라보며 삶의 쓸쓸함을 마음껏 느끼자.
걷는 것은 유산소 운동이니, 건강에 좋다느니 하는 그런 현실적 이득은 잠시 접어두고. 사색해서 무언가를 얻으려 하지도 말고.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그래서 삶의 불합리와 모순, 갈등과 투쟁 등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서 저 무르익은 봄에 나 자신이 녹아 없어지는 법열을 느껴보자.
육당 최남선은 "묵은 심신을 시원하게 벗어 던지고 자유로운 공기를 국토여래의 상적토(常寂土)에서 호흡하리라"고 하며 서재를 박차고 나와 우리 땅을 순례했다. 종교인이 성지를 순례하는 마음으로. 그의 행적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땅을 '국토여래의 상적토'라 한 것은 참으로 듣기에 아름답고 고맙다.
정말 그렇다. 우리 땅은 부처님이다. 불국토요 연화장세계이다. 신성할 뿐만 아니라 포근한 나의 어머니요, 다정한 애인이다. 추연창 도보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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