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병석 노부 극진한 봉양…효녀 처녀 김미경씨

▲ 1992년부터 아버지를 봉양하는 효녀 김미경씨가 어버이날을 맞아 중풍과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며 환하게 웃고 있다.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 1992년부터 아버지를 봉양하는 효녀 김미경씨가 어버이날을 맞아 중풍과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며 환하게 웃고 있다.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17년 전 이맘때였다. 봉제공장에서 수선일을 하던 중에 작업반장이 다급하게 김미경(40·여)씨를 찾았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졌다고 했다. "13세 때부터 집 나간 어머니를 대신해 낮에는 봉제일을 하고 밤에는 집안일을 하며 세 동생들을 키웠어요. 아버지까지 쓰러지셨다고 하니 눈앞이 캄캄해지더군요."

1992년 어버이날은 그에게 더없이 잔인한 날로 가슴에 남아 있다. "병원 침상에 누워 계신 아버지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렸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병원에 입원해도 병이 호전되지 않는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김씨는 아버지를 집으로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간병인을 둘 형편도 못되고 그렇다고 아버지를 집안에 홀로 남겨둘 수도 없어 다니던 봉제공장까지 그만뒀다. 아버지가 잠잘 때는 시간제 봉제일이나 인형 눈과 봉투 붙이기를 하며 생계를 꾸렸다.

김씨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아버지의 병세는 점점 나아졌다. 가난한 삶이었지만 다섯 식구의 단란한 가정에 '행복'이 찾아왔다고 믿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중풍이 재발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치매까지 왔다. 아버지는 꼼짝없이 누워지내는 신세가 됐다. 그때부터 그는 '평범한 여자의 인생'을 포기했다. 한창 꽃따운 25세때였다.

"아버지 병세가 잠깐 좋아지셨을 때 결혼을 생각 안 해 본 것도 아니지만…." 김씨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오늘처럼 어버이날엔 아이들한테 카네이션을 받는 어머니로, 남편에게 사랑받는 아내를 꿈꾼 적이 많아요. 하지만 아버지를 한 번도 원망해 본 적이 없어요."

김씨는 월 15만원의 방 두 칸짜리 월셋집에 살지만 항상 아버지 옆에서 잠들고 일어난다. 아버지와 같은 이불을 쓰는 것이 불편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버지가 물이나 찾지 않으실까 걱정되잖아요. 대소변을 빨리 처리해주지 않으면 살이 헐고 자칫 욕창으로 번질 수 있어요."

매주 월, 수, 금요일은 아버지와 병원에 가는 날이다. 한 번도 병원을 거르지 않았다. 치료 목적도 있지만 아버지께 세상 구경시켜드리기 위해 서문시장까지 둘러본다.

김씨의 효심은 동네에서도 자자하다. 지난 2007년 제35회 어버이날에는 효행부문 국민포장 대통령상을 받았다. 그는 요즘 아버지를 위해 마지막 선물을 준비 중이다. 아버지가 마지막 가시는 길은 풍족하게 보내드리고 싶어 몇 해전부터 꼬박꼬박 장례보험을 넣고 있다. "가난해도 아버지 장례만큼은 남들처럼 해 드리고 싶어요."

김씨는 "아무리 자식이 아버지에게 뭘 한다고 해도 항상 부족하다"면서 "결혼이 대순가요? 전 아버지하고 결혼했어요"라며 환한 웃음을 남겼다. 임상준기자 news@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