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 헌책방 순례

오랜만에 찾아 온 징검다리 휴일,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대충 정리하고 지인과 시청 근처의 헌책방 나들이에 나섰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비좁은 책방의 통로를 헤매며 낡은 책들의 숲에서 한나절을 보냈다. 한 시대를 규정하고 풍미했던 책들, 사상서와 교양 도서, 참고서, 전집류들이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서가에 빽빽이 꽂혀 있었다.

날마다 새로운 인쇄물과 출판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 헌책은 흔히 고물 취급당하기 일쑤요, 헌책방은 고물상 정도로 취급되기가 십상이다. 실제로 온갖 곳에 흩어져 효용성을 다한 책들이 노인정의 노인들처럼 꾸역꾸역 이곳 헌책방으로 모여들어 잘나가던 한 시절을 회상하며 서로의 처지를 위로하고 있는 것 같다.

깨끗하게 간수된 최근의 책들도 있지만 헌책들은 대체로 누렇게 바래져 귀퉁이가 뜯겨져 나갔거나 얼룩져 있기 마련이다. '빛과 그림자의 장난'이라는 세월 속에서 큼큼한 냄새를 피우며 병들고 늙어가는 사람의 생 역시 책의 일생과 별반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싶다.

서가 사이 책의 골짜기를 헤매다 우연히 구석진 곳에 꽂혀 있는 '문학사상'을 발견했다. 창간호! 소풍 온 아이가 선생님이 숲에 몰래 숨겨둔 보물을 찾은 것처럼 흐뭇했다. 시인 이상의 초상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1972년 판, 먼지 묻은 책들을 더듬느라 시커멓게 더럽혀진 손으로 책장을 천천히 넘겨보았다. 창간호답게 최선을 다해 책을 편집하고 꾸려낸 흔적이 역력하다. 당시 독일에서 공연되었던 윤이상의 오페라 '심청'과 이광수 연구가 특집으로 실려 있고, 유진오, 양주동, 주요한, 박화성, 신석정, 서정주, 박남수와 김춘수 등 쟁쟁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실려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한창나이였을 염무웅, 김병익, 김현과 김용직 등의 열띤 리얼리즘 비평과 문학론도 실려 있다.

눈 밝은 사람들은 용도 폐기된 헌책 속에서 근대사나 근대 문학에 관련된 보물 같은 자료들을 용케 발견해내곤 한다. 이때는 발견이라는 말보다 발굴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빡빡한 책장에서 별생각 없이 빼내 본 소설책 갈피에서 단풍잎이나 네 잎 클로버를 발견하기도 한다. 책의 주인은 꿈 많은 문학소년이나 소녀였으리라.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아득한 시간에 자극되어 미소가 저절로 피어오른다.

음악회에 온 것만큼이나 헌책방 순례가 즐겁다. 이 많은 군서들이 뭐라 뭐라고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책방의 좁은 통로를 산책하며 책을 음미하고 즐기다 보면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게 된다. 실학자 이덕무는 책에 미친 자신을 두고 마치 여색에 빠진 것과 같다고 쓰고 있는데, 큼큼한 냄새까지 풍기는 이 헌책들에 대한 애정은 더 심각한 병리적 문제로 파악되어져야 되지 않을까….

헌 것들은 모두 쇠락한 시간 속에 거처를 정한다. 고스란히 늙어 중고품이 되어버린 책과 책방, 이곳은 주인도, 거기 들러 바둑을 두며 소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허름하고 남루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헌책방은 여전히 쓸모 있는 책들이 모이는 곳이다. 대중성이 없어 일찌감치 절판되어버린 책이나 귀중한 국학자료를 구할 수 있는 곳도 바로 이 헌책방이다. 오히려 새 책방이 시류를 좇아 부실하게 만든 책이 더 많다.

파리 센강가의 헌책방과 영국 웨일스의 조그만 시골마을 헤이 온 와이(Hye on Wye)는 헌책만으로 매년 수십만 관광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특히 헤이 온 와이는 옥스퍼드 출신의 리처드 부스가 처음으로 책방을 연 이래 문화예술축제를 기획하고 헌책방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시골 동네가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변신하게 되었다.

한때 동네마다 흔하던 헌책방이 어느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시청 주변과 남문시장 근처, 태평로의 사라져 가는 헌책방들을 누군가가 나서서 대구의 명물로 살려볼 수는 없을까.

서영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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