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타인 향한 희생" 愛憎 교차하는 내조의 애환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선종(善終) 전 가장 가깝고 아끼던 사람을 자신의 운전기사로 꼽았다. 물론 가족과 친지는 당연할 것이다. 소외된 이들에 대한 사랑은 그 이상의 의미였다.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너무 컸다. 그래서 안타까움의 여운도 길다. 30년 동안 추기경의 발이 되어 내조를 다했던 운전기사의 슬픔은 더 남달랐을 터.

우리네 삶에서 '내조의 왕'은 기본적으로 아내 또는 남편, 그리고 자식과 가까운 친척이다. 특히 정치인·기관단체장·기업체 대표 등에겐 그에 못지 않은 사람들이 운전기사, 비서실장, 수행비서(비서), 가정부 등이다. 이들의 애환을 살펴본다.

'타인'에 대한 이들의 내조는 대다수 희생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자신을 버린다. 그래서 서글프기도 하다. 힘겹다. 어떨 땐 슬프고, 어떨 땐 기쁘다. 애환이 많다.

거꾸로 기관·단체장이나 사장의 입장에선 정겨운 운전기사와 가정부가 있는가 하면 섭섭한 내조자도 있기 마련일 게다. 서로의 입장이 다를 수 있다. 끈끈하지만, 애증(愛憎)이 교차되는 관계일 수 있다. 그들의 관계를 엿본다. 내조의 애환(哀歡)이다.

◆내조에 대한 보답

A대학 총장은 2000년대 중반 4년 임기를 마치면서 운전기사, 비서(비서실장, 수행비서) 등과 부부 동반 저녁 모임을 주선했다. 총장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친 뒤 자신을 보필했던 이들의 아내들에게 '금일봉'을 내놓았다. 그리고 진심어린 말을 전했다. "저 때문에 남편이 늦게 집에 들어가거나 집안 일에 소홀할 수 밖에 없었지요. 정말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90년대 중반, 허름한 주택 단칸방에 살던 가정부 B씨(대구시 북구 칠성동)는 딸의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B씨는 자영업자인 여사장 C씨(대구시 동구 신천동)의 아파트에서 10년가량 정성을 다했다. 가정부 일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하지만 실제 30분 일찍 여사장의 집에 가 한 시간 더 늦게까지 음식, 빨래, 청소에다 심지어 아이들까지 살갑게 보듬었다. 가끔 여사장의 집에 손님이 올 때면 불평없이 오후 9시든, 10시든 밤늦게까지 자리를 지켰다. 여사장은 B씨의 딸 상견례를 1주일 앞둔 어느날, B씨를 불러 79㎡(24평) 아파트 계약서를 내놓았다. "그래도 사위 될 사람을 번듯한 집에서 맞이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B씨는 지금도 C씨의 집안일을 돌보며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이 같은 사례는 꽤 있다. 정유사 사장을 30년간 열심히 보필했던 운전기사가 그만두면서 결국 주유소 하나를 물려받거나, 모 기업체 사장의 운전기사를 하다 사장이 병이 나자 수년 동안 병 수발까지 했던 사람이 지금은 '이사' 직함과 대우를 받으며 비서, 운전기사를 겸하고 있다는 실례도 있다.

모기업체 D사장의 운전기사 E씨. D사장의 대다수 운전기사들은 통상 3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운전기사들을 혹사시켰기 때문이다. E씨는 서울까지 갔다가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30분 만에 다시 부산으로 내려오고, 겨우 집에 도착하면 몇 시간 뒤 또 불려나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E씨는 잘 견뎠다. '이 일을 하려면 사생활을 포기해야겠지.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여겼다. 두 달을 넘긴 어느 날 D사장은 "수고했다. 내일부터 매일 9시에 출근하라"고 했다. 그리고, 2년 뒤 이 사장은 E씨에게 "집에 갔다와라. 아내가 뭘 줄 것이다"고 했다. D사장의 아내는 사글세를 살고 있던 E씨에게 아파트 전세계약서를 내밀었다. 그리고 약 10년 뒤 이 전세 아파트는 E씨의 소유로 바뀌었다.

◆'코드 맞지 않는' 내조의 뒷얘기

기관단체장과 기업체 사장 운전기사들은 군 시절 부대장 전용 지프차를 칭하던 이름에서 따와 자신들이 모는 승용차를 '1호차'라고 한다.

군 장교 출신으로 모호텔 회장을 지냈던 F씨는 수년 전 자신의 운전기사에게 곤욕을 치렀다. F씨는 군에서의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 운행도중 툭하면 기사에게 잔소리하고, 보채고, 꾸짖고 했다. 운전을 똑바로 하지 않는다며 '뒤통수'를 때리기도 했다. 서울을 다녀오던 어느날, 그날도 운전기사를 괴롭혔다. 고속도로에서 제한속도를 넘어 달리는데도 '속도를 내지 않는다'고 호통을 쳤다. 자존심을 짓밟는 말까지 했다. 운전기사는 갑자기 차를 갓길에 세웠다. 그리고 "그만두겠다. 알아서 집에 가시라"며 차 열쇠를 인근 논두렁에 던져버린 뒤 사라졌다.

2000년대 초반, 지역 모업체 대표는 부산의 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지인 1명과 함께 승용차에 올랐다. 부산에 도착한 뒤 이 대표의 지인은 고생했다며 운전기사에게 10만원짜리 수표 1장을 건넸다. 이 대표는 행사를 마치고 운전기사와 단둘이 되돌아오던 승용차 안에서 '수표를 잠깐 달라'고 했다. 그러더니 자신의 지갑에서 현금 5만원을 꺼내 운전기사에게 건네며, "운전은 네가 했지만, 차는 내 차이니 반반 가르자"고 했단다. 이 대표의 운전기사들도 자주 바뀌었다.

◆내조의 역할

오랫동안 지역 단체장 수행비서를 해온 A씨는 '비단옷을 입고 그믐달 밤길 가듯이' 하는 게 비서의 역할이라고 표현했다. 내조하는 사람들은 본인은 드러내지 않으면서 맡은 일을 수행해야 된다는 것. 지역 단체장 비서실장 B씨는 내조의 기본요소로 ▷그림자처럼 ▷이심전심 ▷진실성 등을 꼽았다.

A씨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모시는 그림자 역할이 필요하다"며 "단체장의 일정과 건광관리, 기분까지 챙기는 마인드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토론회나 발표, 행사에 대해 미리 대응할 준비를 한 뒤 적절한 조언을 하며 부단체장의 역할까지 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라고 했다.

B씨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면 오래가지 못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며 "출퇴근 하는 직장인이라기 보다는 가정과 생활을 버리는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감각과 타이밍이 중요하다"며 "모시는 사람의 의중과 심성까지 파악해야 제대로 된 보좌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내조의 어려움(애로)

자신과 가족을 돌보기에도 벅찬 우리 삶에서 '남'을 보좌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닐 터다. 상당수 가정과 사생활까지 일정부분 포기하면서 내조의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모기관장 비서실장은 "기관장을 대신해 악역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이 힘들다"고 말했다. 술취한 사람이나 업무와 상관없이 기관장을 만나려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핑계로 되돌려 보내야 한다는 것. 피곤한 기관장이 잠시 눈을 붙일 때 직원들에게 조차 '자리에 없다'거나 '출장갔다'는 등 거짓말까지 할 때도 있다.

'1호차' 운전기사들은 ▷24시간 긴장 ▷졸음운전 ▷관절염, 치질 등 각종 질병 등을 호소한다.

한 기사는 "장거리 운전에서 어떤 분들은 '피곤하면 언제든지 휴게소를 들러라', '알아서 창문을 내려라'고 하기도 하지만, 어떤 분들은 사소한 소음에도 신경질을 낸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입냄새 제거 스프레이를 코에 뿌려 졸음을 쫓거나, 창문을 내리지도 못한 채 볼펜으로 허벅지를 찌르기도 한다"고 했다.

또 다른 운전기사는 "사장이 밤늦게 술을 마실 경우 제대로 집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먼저 들어가라'고 하는데도, 새벽까지 기다렸다가 모셔야 한다"고 말했다.

◆내조 에피소드

조직폭력배 보스이자 건설업자가 외제차를 타고 88고속도로를 달렸다. 워낙 성격이 급해, 운전기사는 제한 속도를 훨씬 넘게 몰았다. 그러다 갑자기 차를 세웠다. 보스가 "뭐하는 것이냐"고 했다. "회장님 큰일났습니다. 길이 없습니다" 보스는 "무슨 소리야. 지금 차량도 별로 없어 도로가 뻥 뚫렸는데"라고 큰소리쳤다. 그런데 도로변에 '갓길 없음'이란 표지판이 보였다.

휴일날 모 병원 원장이 인근 골프장에 갔다. 원장이 골프를 칠 동안 운전기사는 다른 기사들과 어울려 포커게임을 벌였다. 포커게임에서 꽤 많은 돈을 잃었다. 골프를 마치고, 병원 원장이 자신의 승용차에 올라타려다 다른 친구의 부름을 받고 차 문을 닫은 뒤 잠시 친구 곁으로 갔다. 돈 잃은데 정신이 팔린 운전기사는 빈 승용차를 내몰았다. 한 참 뒤 교차로에서 "원장님, 어디로 가시면 됩니까"라고 했으나, 대답이 없었다. 뒤를 돌아보고 원장이 없다는 사실을 안 그는 골프장에 되돌아갔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한 운전기사가 저녁에 기관장을 모시고 음식점에 갔다. 지역 기관·단체장 모임이었다. 대다수 기관장들이 술에 만취했다. 술을 좋아하는 이 운전기사도 기다리다 소주를 들이켰다. 모임이 끝난 뒤 기관장 3명을 함께 태우고 차를 몰았다. 앞쪽에 음주단속 중이었다. 재빠르게 차문에서 내린 운전기사는 기관장이 앉은 조수석 문을 열고 말했다. "자리를 좀 바꾸시죠. 저도 술을 마셨거든요. 기관장님은 운전할 일이 거의 없으니, 면허가 취소되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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