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영화속 예술 산책] 피아노의 숲

아무리 해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얼마나 비참할까.

모차르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속설이 있는 살리에르가 바로 그렇지 않았을까. 뼈대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음악에 입문해 궁중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자신이 참으로 뿌듯했으리라. 그러나 괴상한 음악가 모차르트가 굴러오면서 그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파렴치하고 천박하기 짝이없는 모차르트에게 신은 오묘한 천재성을 부여했다.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밀로스 포만 감독의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의 악보를 들고 질투와 시기심, 신에 대한 배신감에 떠는 살리에르의 모습은 참 인상적이었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르는 비범(非凡)한 천재와 노력하는 범인(凡人)의 상반된 이미지를 얘기할 때 곧잘 등장하는 캐릭터이다. 천재야 어째 방법이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살리에르의 노력을 폄하할 수 있을까. 인간이 가진 한계까지 노력을 아끼지 않은 인물이다. 그렇다면 예찬을 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늘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일본 애니메이션 '피아노의 숲'을 만났다.

'피아노의 숲'은 두 소년의 우정과 피아노에 대한 열정을 그린 클래식 판타지 애니메이션으로 2007년 고지마 마사유키가 감독했다. 일본 내에서 350만부 이상이 팔리며 인기를 끌었던 잇시키 마코토의 동명 만화를 스크린에 옮긴 것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 클래식 음악을 소재로 한 것이 더러 있다. '첼리스트 고슈'도 혼자 사는 노총각 첼리스트가 동물들과 교감하면서 엄청난 음악적 발전을 이룬다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그린 작품이다. 할리우드에서는 월트 디즈니가 아이들의 클래식 교본과 같은 애니메이션 '판타지아'를 만들어 인기를 끌기도 했다. 애니메이션의 판타지와 클래식의 깊이는 어긋버긋해 보이면서도 아귀가 잘 맞다. 음악의 신비감을 애니메이션의 상상력이 더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피아노의 숲'도 신비한 숲 속을 피아노 선율이 감도는 느낌이 잘 전해지는 영화다. 가난하고, 천방지축인 소년 카이. 그는 숲 속에 버려진 피아노가 유일한 친구다. 덩치 큰 아이들에게 맞아도 숲으로 뛰어가 피아노를 치면 모든 것이 씻은 듯 풀린다. 어느 날 도쿄에서 슈헤이가 전학을 온다. 말쑥한 차림에 늘 깨끗한 옷을 다려 입는 슈헤이와 맨발에 때가 꼬질꼬질하게 묻은 옷을 입은 카이. 피아노가 아니라면 둘은 애초에 어울릴 수도 없는 친구다.

슈헤이가 피아노 레슨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카이는 그를 피아노의 숲으로 데려간다. 온갖 비바람을 맞으며 버려진 피아노. 슈헤이가 연주하면 소리가 나지 않던 피아노가 카이가 연주하면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주게 된다. 음악이 흐르면 숲이 살아난다. 생명들이 카이의 피아노 소리를 듣기 위해 모여든다. 슈헤이는 격한 심리적 동요를 느낀다. 피나는 노력을 해 온 자신이 초라해지는 순간이다. 살리에르가 느끼는 시기심, 배신감과 비슷한 것이다.

우연히 카이의 연주 솜씨를 들은 음악 선생 아지노는 카이에게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워 콩쿠르에 나가기를 권유한다. 과연 콩쿠르에서는 어떻게 되었을까. 천재적인 음악성에 매료된 심사위원들이 모두 카이의 손을 들어줄까.

숲 속에 있는 불가사의한 피아노를 소재로 천재적인 소년과 지나친 교육 때문에 피아노를 사랑하지 않게 된 소년이 엮어내는 순수한 우정과 갈등의 이야기다. 카이가 자신을 떠나지 않던 모차르트 귀신과 싸우고, 슈헤이가 뚜렷한 실력 차이에도 끊임없는 노력하는 등 만화 이상의 상징과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 속에서 연주하는 모든 장면을 보면 연주와 손가락의 움직임이 기가 막히게 잘 맞다. 그것은 모션 캡처라는 기술을 통해 100% 일치시킨 때문이다. 특히 음악을 들을 수 없었던 만화에서 카이의 연주는 신비 속의 마력이었다. 영화에서는 6세 때부터 천재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렸던 러시아 출신의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가 카이의 연주를 맡았다고 한다.

콩쿠르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이다. 콩쿠르는 그냥 놀이의 하나로 피아노를 쳐 오던 카이가 진지하게 피아노를 대하는 계기가 된다. 객석과 무대에서 희열을 느끼는 진정한 프로로서 천재성을 보여주게 되는 무대다. 이제 자신만의 숲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슈헤이 또한 무대는 물러설 수 없는 승부처다. 자신의 피나는 노력의 결실을 맞보아야 할 자리이다.

카이의 뛰어난 솜씨에도 심사위원들은 슈헤이의 손을 들어준다. 콩쿠르의 취지가 천재를 발굴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이유다. 참 적절한 해석이다. 카이에게 더 큰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해주고, 슈헤이에게는 노력한 이에게 보답하는 등용문이 된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화해랄까, 아니면 현실적 대면이랄까. 영화는 둘 모두에게 찬사를 보내며 끝이 난다.

살리에르의 충격적인 음모를 들춰낸 '아마데우스'처럼 극적이거나, 대결적 서스펜스가 아닌 '피아노의 숲'. 그래서 훨씬 더 다정다감하고, 현실감이 느껴진다.

김중기 객원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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