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마니아와 함께 떠나는 세계여행] 영화관의 여행자

배낭 메고 낯선 길 홀로 걷던 여행의 느낌 그대로

오늘도 나는 심야영화를 보러 간다. 오후 10시를 넘긴 늦은 퇴근길, 나는 드디어 소란스러운 세상의 틈바구니에서 빠져나왔다. 술 약속도 없고, 친구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전화기를 붙들고 수다를 떨고 싶지도 않은, 집에 돌아가기엔 아쉽고 심심한, 그냥 그렇고 그런 어제와 똑같은 5월의 밤, 낡은 소형차를 몰고 극장으로 간다. 올림픽대로는 벌써 텅 비었고 라디오에서는 신나는 록음악이 흐른다. 나는 지구에서 홀로 텅 빈 대로 위에 떠 있다.

이 느낌…, 닮았다. 배낭을 메고 낯선 길을 홀로 걷던 여행의 느낌과. 외롭고 자유롭던, 오로지 나 홀로 세상을 대면했던 여행의 느낌과 그대로다. 심야 한산한 극장에 내 발걸음 소리가 쿵쿵 울린다. 나는 텅 빈 객석 한가운데 조용히 앉아 홀로 스크린을 대면한다. 영화가 시작되고, 나는 오래 전 여행의 시간 속으로 돌아간다.

여행은 그곳을 구경하는 게 아니다. 여행은 그곳을 느끼며 머물러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방인인 나는 그곳에서 특별히 할 일이 없다. 그냥 거리를 걷는다. 낯선 사람들 속에 섞여 본다. 마음 내키는 곳에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주 심심한 날에는 극장에 간다. 유럽에서도, 아프리카에서도 나는 자주 그랬다.

부쿠레슈티(루마니아의 수도)의 두 편의 영화가 저녁에 딱 두 번씩만 상영되는 낡은 영화관. 곰팡이 냄새가 나는 어둡고 좁은 극장 안에서 연인들 몇 쌍과 인상이 험악한 아저씨들 틈에서 제목도 알아볼 수 없는(루마니아어로 쓰여있었기에) 영화를 보았다. '혼자 영화 보러 온 저 동양여자는 뭐야?'라는 듯한 수상한 눈길들에 잔뜩 웅크리고 있어서인지 영화 내용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대구시내 한복판 대구은행 앞에서 20년 넘게 노점상을 하셨던 외할아버지를 생각했다. 어린 시절 시내로 놀러 갈 때마다 외할아버지는 노점 옆의 작은 영화관에 나를 보내 주셨다. 거기서 상영되었던 영화 대부분은 큰 극장에는 걸리지 않았던, 아이들은 볼 수 없는 홍콩무협영화였다. 좁은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대부분 어른 남자들이었고, 겨우 열 몇 살의 조그만 여자아이였던 나는 기가 죽어 죄 지은 사람처럼 잔뜩 웅크린 채 영화를 봤다. 하지만 영화 속에는 내가 처음 만난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들어있었고, 들뜬 얼굴로 영화를 보고 나오는 나를 보고 외할아버지는 무척 행복해 하셨다. 그 시절 나에게 영화 보기는 어른이 된 지금의 여행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어른이 되면 꼭 홍콩에 가서 무협영화 주인공처럼 무술을 배우고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커다란 왕만두도 먹어 보리라 결심했다.

터키의 소도시 데니즐리에서(나는 데니즐리에서 가까운 시골마을에 7개월 동안 머물렀다)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 극장에 갔다. 군것질을 좋아하는 왁자지껄한 터키인들 틈에서 나 역시 부지런히 초코바나 감자칩을 씹어먹으며 부산하고 유쾌하게 영화를 봤다. 애연가가 많은 터키사람들은 영화가 상영되는 2시간 동안 담배를 참으며 꼼짝 않고 앉아 있는 것을 절대 못한다. 그래서 영화는 반드시 중반부에 잠시 끊어지고 휴식시간 10분이 주어진다. 2시간 정도는 거뜬하게 영화에 몰입하는 데에 익숙한 나로서는 난감하기 그지없다. 마치 TV드라마가 꼭 재미있는 대목에서 끝이 나며 다음주를 예고하는 바람에 김이 새어 버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쉬는 시간 10분은 내게 또다른 재미가 되었다. 혼자 영화를 보러 온 동양여자를 궁금해 하며 말을 걸고 간식거리를 나눠 주는 터키사람들과 수다도 떨게 되었고, 나중엔 영화를 보러 올 때마다 만나는 친구가 생기기도 했다. 영화 보기 덕분에 나는 이방인 주제에 금세 터키인들의 삶 속으로 침투했고, 극장 가는 일은 여행 속의 일상이 되었다.

새로운 곳에 도착할 때마다 나는 그곳에서 제일 만만한 극장부터 찾는다. 그렇게 내가 찾은 최고의 극장은 짐바브웨(남아프리카의 내륙국가)의 수도, 하라레에 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중의 하나인 하라레에는 멀티플렉스 극장 같은 곳이 두어 곳 있었다. 그리고 우리 돈으로 약 500원이면 최신 영화 한 편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하라레의 극장을 좋아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10월 말, 고산도시 하라레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마치 지금 우리의 봄날씨처럼 햇살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도심의 가로수는 자카란다 나무이다. 그 즈음 자카란다는 붉은 꽃망울을 활짝 피우며 단풍처럼 거리를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매일 자카란다 꽃잎이 뒤덮인 붉은 가로수길을 걸어 극장에 갔다. 점점 영화를 보는 것보다 영화를 보러 가는 산책길이 더 좋아졌다. 하라레 극장 가는 길은 마치 우리 동네 슈퍼 가는 길처럼 익숙하고 편안해졌다.

미노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