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사이렌의 誘惑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고비를 넘겼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장클로드 트리셰 유럽중앙은행 총재는 11일 스위스 바젤에서 선진 10개국 중앙은행 총재 회의를 주관한 뒤 "세계 경제가 변곡점 근처에 도달했다"며 "신용위험 수치나 채권 간 금리차 등 지표들만 보면 지난해 리먼 브러더스 사태 이전으로 회복된 게 아니냐는 판단도 가능하다"고 했다. 그동안 비관적인 전망으로 일관했던 조지 소로스 퀀텀펀드 회장도 "세계 경기의 자유낙하는 끝났다"고 가세했고, 이에 앞서 7일에는 '미스터 쓴소리'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도 "경기 하강 속도가 둔화되고 있다"고 했다.

과연 금융위기는 끝나가고 있는가. 정말 그렇다면 좋겠지만 1920년대 대공황의 경험은 이 같은 진단이 섣부른 낙관론일 수 있음을 말해준다. 미국 증시는 1929년 10월 24일과 29일 두 차례 대폭락으로 주저앉았으나 그해 겨울과 1930년 봄에 다소 되살아났다. 폭락했던 주가도 45% 수준까지 회복됐다. 이 같은 반짝 상승은 미국 지도자들에게 경제가 정말로 살아나고 있다는 착각을 갖게 했다. 후버 대통령은 1930년 백악관을 방문한 종교단체 지도자들이 "(경제 회복을 위해)공공사업에 더 많이 투자해 달라"고 요청하자 한껏 여유를 부렸다. "두 달 먼저 방문했으면 그런 얘기가 통했을 텐데 지금은 아닙니다. 불황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후버의 희망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주가가 다시 곤두박질치면서 1932년 중반 주가는 1929년 고점의 10분의 1수준으로 떨어졌다.

금융위기를 불러온 근본적 원인이 무엇인지 아직 정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재발 방지를 위한 구속력 있는 제도도 확립되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세계 경기 낙관론은 문제를 덮어 버림으로써 위기를 또다시 내재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금융위기의 원인을 놓고 '미국 과소비론'과 중국 등 미국 이외 국가의 '과잉저축론'이 대립하고 있다. 과소비론은 미국 국민이 능력 이상의 과소비를 하고 있으며 그에 필요한 재원 마련을 위해 채권(주로 국채)을 세계시장에 판매한 결과 세계 저축의 4분의 3을 흡수하면서 미국이 채무 함정에 빠지게 됐다는 것이 골자다. 미국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과잉저축론은 아시아와 중동 국가들이 수출을 통해 엄청난 국제수지 흑자를 낸 결과 세계적인 '저축홍수'가 발생했고, 이것이 미국으로 유입되면서 과소비를 낳았다는 것이다.

대립하고 있지만 두 주장이 공통으로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중국 등 미국 이외의 국가가 지속적으로 국제수지 흑자를 내고 있고 이것이 미국인 과소비의 재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의문은 왜 미국 이외의 국가는 기를 쓰고 국제수지 흑자에 매달리느냐이다. 이는 불안정한 국제금융 시스템 때문이다. 아시아국가들은 1997년 외환위기를 통해 이러한 시스템 하에서 국제수지 적자가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뼈저리게 경험했다. 여기서 체득한 것은 믿을 것은 든든한 외환보유고 뿐이라는 신념이었다. 그래서 어떤 비용을 치르고라도(개발도상국과 신흥공업국들이 외환보유고 유지에 들이는 비용은 평균적으로 매년 GDP의 1%에 달한다) 외환보유고 확충 곧 과잉저축을 멈추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미국 이외의 국가들이 과도한 저축을 하지 않아도 안심할 수 있는 안정된 금융 시스템의 구축이다. (미국이 중국 등 무역상대국에 요구하고 있는 내수 확대는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는 소리이다) 하지만 현실은 실망스럽다. 위기 이후 새로운 국제금융 시스템 구축을 위한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성과는 보이지 않는다. 지난 4월 영국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도 이 문제가 논의됐으나 구속력 있는 방안 마련에는 '선언적' 수준의 합의에 그쳤다.

안정된 국제금융 체제가 구축되지 않는다면 아시아국가들의 과잉저축은 계속될 것이고 미국을 향한 일방적인 자본 흐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 수석 칼럼니스트 마틴 울프는 "이 같은 흐름이 바뀌지 않으면 향후 10년 내에 또 다른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제기되는 세계 경기 회복론은 위기 재발 가능성을 호도하는, 사이렌의 아름다운 노래라는 생각이 든다.

鄭 敬 勳(논설위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