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의 섬은 두꺼비 '섬(蟾)'자로 작명의 유래가 고려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말 우왕 때 왜구들이 침략해 하동 쪽에서 강을 건너려고 할 때 수만 마리의 두꺼비들이 섬진 마을 나루터로 몰려와 진을 치고 울부짖어 왜구들이 퇴각하였다는 야사가 있어 두꺼비 '섬(蟾)', 나루 '진(津)'을 써 섬진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라선 철길과 함께 섬진강을 나란히 달릴 때면 강 건너 산자락에 편안히 자리 잡은 강변 마을들이 더없이 정겹게 다가온다. 철 따라 사람들이 강가에선 은어를 잡고 재첩을 줍는 풍광이 산수화 속의 한가한 도인처럼 여유롭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다는 화개장터 강나루에는 건너갈 사람을 기다리는 나룻배가 다소는 지루하게 지키고 있고, 악양 평사리를 지나자면 은모래 백사장의 포플러가 강바람에 일렁거린다.
본래 이 길은 무리를 지어 피어나는 꽃길로도 환상적이다. 지리산 자락 구례 상위 마을의 산수유, 쌍계사 십리 벚꽃, 청매실농원의 매화꽃은 아름다움을 넘어서 경건한 경외심을 자아내도록 만든다. 어느 해에는 산을 따라 강을 따라 은어회와 소주 한 잔, 재첩국의 점심, 털보게장으로 참까지 곁든 음식 기행까지 하면서 해질 녘을 섬진강변 평사리에서 보낸 적이 있다.
한낮의 섬진강은 진초록 쑥빛이지만 석양을 받아 반사하는 저물 녘의 섬진강은 보랏빛으로 변해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처럼 교태를 부리며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저무는 섬진강변에서 우뚝 솟은 최참판댁 기념관을 보며 소설 토지에 나오는 방대한 분량의 생동하는 인물과 뜨거운 형상의 혼이 나를 에워싸며 발목을 잡는다. 등장인물이 하도 많아 1부 중간쯤부터는 노트 한 권에 등장인물의 이름과, 특성, 연관관계를 적어가며 읽은 기억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등장인물이 자그마치 578명이나 되었다.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 추상같은 위엄으로 고향을 지키던 서희나 그의 남자 길상과 얽힌 로맨스, 그리고 굴곡이 점철된 인생역정으로 안타까워 발을 굴렀고, 무당의 딸 월선과 용이의 애절하고 달빛 같은 사랑에 읽다가 울었으며, 서희의 몸종 봉순이 훗날 기생이 되어 불운하게 살다가 이 섬진강 물에 몸을 던졌을 때는 몸을 떨며 슬퍼했다. 소설은 서희가 조준구로부터 되찾은 토지를 마을 사람들에게 다 나눠줌으로써 대미를 장식한다.
작가 박경리가 유방암 수술을 받고 보름만에 퇴원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집필한 투혼의 소설 '토지'는 서희를 통해 우리에게 땅, 토지가 가지는 의미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펄벅의 대지를 읽으면서 서양인이 예리하고 현장감 있게 동양적인 중국 정서를 그린 데 대해 감탄과 함께 묘한 열등의식과 치기 어린 분노를 느꼈던 여고시절, 나는 토지를 읽고 단숨에 열등의식에서 벗어나 중국과 달리 우리는 우리 작가가 쓴 우리 정서의 소설이 있다는 문화적인 자부심을 가졌다. 내가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했던 박경리 선생이 타계했을 때 나는 문상가고 싶을 만큼 절실하게 허전했다. 며칠 전 1주기 기일 날, 추모 행사가 여기저기에서 열렸고 추모집(봄날은 연두에 물들어)도 발간했다고 한다.
정현주(고운미피부과의원 원장)
053)253-0707, www.gounm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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