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폭탄주

지난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이 일본에 콜드게임패했다. 그날 저녁 김인식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는 소주 폭탄주로 쓰라린 속을 달랬다. 기울어진 승부에 좋은 투수를 소모할 이유가 없어 불가피하게 점수 차가 크게 벌어졌는데 이를 몰라주는 야구팬들이 많아 속상했다는 후문이다. 소주 폭탄주로 마음을 다잡은 대표팀은 준우승이란 쾌거를 이뤄냈다.

폭탄주만큼이나 세계에 대한민국을 각인시켜 주는 문화 코드도 드물다. 제정 러시아 때 시베리아로 유형을 간 벌목 노동자들이 추위를 견디기 위해 보드카와 맥주를 섞어 마신 게 기원이라지만 本土(본토)보다 한국에서 더 각광받는 게 폭탄주다.

그 폐해를 십분 인정하면서도 폭탄주가 지닌 나름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폭탄주의 매력 중 하나가 다양하게 變奏(변주)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고전이랄 수 있는 양주 폭탄주 시대는 저물고 지금은 소주 폭탄주가 주도하고 있다. 경제난에다 가짜 양주가 기승을 부리는 탓이다. 한국을 찾은 일본 관광객과 바이어들도 '소폭'을 즐기고, 한 다국적기업은 영업사원들에게 소주 폭탄주 제조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맥주 대신 막걸리를 붓고 사이다를 약간 가미한 소주를 섞은 막걸리 폭탄주와 보드카 폭탄주도 인기를 높여가는 추세다. 박연차 회장이 즐긴 물 폭탄주도 있다.

좌중의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데에도 폭탄주가 그만이다. 폭탄주로 술자리가 훈훈해져 사업에 도움을 받는다는 외국기업 CEO들이 많다. 참석자들이 똑같이 폭탄주를 마셨던 것에서 벗어나 각자 주량에 맞춰 폭탄주를 마실 수 있게 술자리 분위기가 달라진 것도 폭탄주 인기의 한 요인이다.

카자흐스탄을 방문했던 이명박 대통령이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과 보드카 폭탄주 석 잔을 함께 마셨다. 첫 잔은 이 대통령, 둘째 잔은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번갈아 만들었고, 마지막 잔을 제조한 이 대통령은 "'너와 나는 하나'라는 의미"라며 팔을 걸고 러브샷까지 했다는 것이다. 두 정상 간 스킨십을 통해 에너지'자원 등 주요 현안들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고, 정상회담은 합의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잘만 활용하면 폭탄주도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 나간 생각인가.

이대현 논설위원 sk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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