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자연 그대로…' 소담스런 정원들

▲ 삼가헌의 외별당인 하엽정은 누마루에 올라 방지원도형의 연못과 참나무, 탱자나무 등을 내려다보는 풍광이 일품이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 삼가헌의 외별당인 하엽정은 누마루에 올라 방지원도형의 연못과 참나무, 탱자나무 등을 내려다보는 풍광이 일품이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 성주 한개마을의 한수헌 정원. 누마루와 팔작지붕 처마, 연못과 계곡물이 잘 어우러져 있다.
▲ 성주 한개마을의 한수헌 정원. 누마루와 팔작지붕 처마, 연못과 계곡물이 잘 어우러져 있다.
▲ 정자앞을 흐르는 물길과 울창한 나무들이 어우러진 초간정.
▲ 정자앞을 흐르는 물길과 울창한 나무들이 어우러진 초간정.
▲ 경주 안압지.
▲ 경주 안압지.

산새 울음과 물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다른 소리는 없었다. 물소리와 새소리만 잔잔하게 고요함을 깨고 있었다. 언덕 뒤편 숲에서 산새의 지저귐이 끊이지 않았다. 물은 대나무관을 타고 흘렀다. 연못으로 떨어지는 물소리는 상큼했다. 물고기들이 모였다 흩어졌다 했다. 누마루에 올랐다. 연못과 나무와 언덕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왔다.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에 오른 듯했다. 연못에 비친 나무와 꽃이 바람에 흩날렸다. 싱그러웠다. 물고기는 나무와 꽃들 사이로 헤엄쳤다. 연못 중앙에 작은 섬이 솟았다. 섬 한복판의 배롱나무(백일홍)가 한들거렸다. 국화가 곁을 지켰다. 돌배나무, 단풍나무, 목련, 홍도화, 노랑꽃창포가 연못을 에둘렀다. 별당 담벼락 바깥엔 참나무와 탱자나무가 굽어보고 있었다. 200년 풍상을 겪은 나무다. 두 나무는 1809년 삼가헌(三可軒) 몸채와 함께 태어났다.

삼가헌 외별당 '하엽정'(荷葉亭)의 풍경. 너무나 소담스러웠다. 대구 달성군 파회마을에 둥지를 틀고 있다. 야트막한 용산(龍山) 자락에 연못과 섬과 나무와 물고기가 어우러졌다. 직사각형 연못과 둥근 섬이 조화를 이룬 방지원도(方池圓島)의 전형이다. 이는 둥근 하늘과 모난 땅을 뜻하는 선인들의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반영하기도 한다. 여기에 누마루에 오른 사람까지 포함하면 결국 '천지인'(天地人)이 되는 셈이다. 취금헌 박팽년의 19대손 박도덕(60)씨는 하엽정 연못에서 쪼갠 대나무관과 파인 돌을 손보고 있었다. 박씨는 "누마루에 걸터앉아 산과 연못을 바라보면 저절로 상념이 씻겨지는 듯하다. 하엽정 정원이 앞으로 200년이 아니라 2천년을 이어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주정사(寒洲精舍)의 한수헌(寒水軒)도 자연과의 조화를 잘 이룬 정원을 안고 있다. 성주군 한개마을의 가장 안쪽 산기슭. 대청마루보다 한뼘 반 정도 높은 누마루와 팔작지붕 처마가 어우러졌다. 장방형으로 이어진 두 연못과 둥근 섬, 영취산 자락을 타고 내려온 계곡물이 운치를 한껏 뽐낸다. 산허리의 모양을 그대로 살려냈고, 소나무 향나무 배롱나무가 정취를 더하고 있다.

정원(庭園). 여유가 묻어난다. 여유 있는 이들이 주로 조성했다. 인공과 자연의 조화다. 흙, 돌, 물, 나무, 그리고 정자나 누각, 계단과 담과 울타리 등 인공 구조물이 어우러진 뜰. 특히 한국의 전통 정원은 인공미를 최소화하고 자연의 멋과 맛을 잘 살려낸 데 묘미가 있다. 옛 정취가 한껏 묻어나는 대구경북지역의 전통 정원으로 발길을 돌려보자. 생활전선은 힘겹지만, 마음만은 여유와 풍요를 만끽할 수 있을 터.

◆전통 정원의 성격, 조성 주체와 동기

조성 주체나 동기, 성격에 따라 별서(別墅)정원, 향원(鄕園), 산수(山水)정원, 궁궐(宮闕)정원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크게 궁궐정원과 민간정원으로 나누기도 한다.

별서정원은 주로 벼슬에서 물러난 선비가 낙향해서 지은 것을 말한다. 벼슬이나 당파싸움에 연연하지 않고 세속에서 비껴나길 원했던 이들이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기 위해 조성한 것.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심상을 반영해 전원이나 산속 깊은 곳에 집이나 정자를 지었다.

향원은 고향의 전원(田園)을 말하지만, 벼슬이나 낙향 등과 상관없이 특정 가문이나 개인이 고향 마을에 조성한 정원을 일컫기도 한다. 산수정원과 궁궐정원은 말 그대로 산이나 바위, 계곡 등지 자연 속에서 그 경관을 활용해 정자나 누대를 조성한 정원과 궁궐 안에 꾸몄던 정원을 각각 말한다.

◆별서정원

서석지(瑞石池) 정원(영양군 입암면 연당리)과 청암정(靑巖亭·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이 대표적이다.

서석지 정원은 여름 연꽃, 늦가을 은행나무의 풍광이 돋보인다. 주일재 건물 앞 흙돌담으로 둘러싸인 연못은 연꽃을 가득 품고 있다.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로 꾸며진 사우단(四友壇)과 연못 속 90여개의 돌들이 모두 제 이름을 뽐내고 있다. 1613년 성균관 진사를 지낸 석문 정연방은 돌 하나 하나에 '와룡암' '어상석' '분수석' '선유석' 등 식으로 이름을 붙였다. 상서로운 돌이 있는 연못이라고 해 '서석지'라고 했다. 가슴을 활짝 편 은행나무 한그루는 400년 비바람을 감내하며 담벼락 바깥에서 정원을 꿋꿋이 지키고 있다. 담양 소쇄원, 보길도 세연정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민간정원의 하나로 꼽힌다.

청암정은 영화 '스캔들' 제작에 기여한 아름다운 정원이다. 울창한 숲 속 거대한 바위 위에 정자가 앉아 있다. 바위를 둘러싼 연못과 아름드리 숲을 이룬 왕버들이 한 폭의 그림이다. 정자 뒤편 바위틈에는 오래된 산단풍나무와 산철쭉이 운치를 더한다. 예조참판을 지낸 충재 권벌이 1519년 기묘사화 때 파직당해 닭실마을에서 은거했고, 7년 뒤 본채와 별당인 청암정을 조성했다.

전남 담양군 소쇄원, 강진군 다산정원, 완도군 보길도 부용동정원 등도 자연과 조화를 잘 이룬 대표적 별서정원이다.

◆향원

하엽정(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한수헌 정원(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연정(蓮亭·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등이 지역의 대표적 향원이다.

전통 기와집이 모여 있는 선원리 마을의 가장 깊숙한 산기슭에 자리 잡은 연정. 정자 앞으로 학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시냇물이 굽이치고, 정자 동쪽에 구부정한 연못이 연꽃을 감싸안고 있다. 소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물버들, 향나무, 회화나무, 모과나무 등이 연못을 둘러싸고 숲을 이뤄 자연의 맛을 물씬 풍긴다. 영화 '여름이야기'에서 일반인들에게 속살을 드러냈다. 연정공 정일릉이 1756년에 세웠다고 전해진다.

하엽정의 경우 본채인 삼가헌은 박팽년의 후손 박성수(호 삼가헌)가 1747년 초가를 지은 뒤 그의 아들 박광석이 1809년 초가를 헐고 기와집을 세웠다. 외별당인 하엽정은 박규현이 1874년 건립했다. 한수헌은 1767년 이민검이 처음 지었고, 성리학자인 한주 이진상이 1866년 고쳐 지었다고 전해진다.

◆산수 정원

침수정(영덕군 달산면 옥계리), 초간정(예천군 용문면 죽림리), 금선정(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독락당(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등이 자연을 벗삼은 정원이다.

옥계계곡의 청아한 물결을 내려다보는 침수정은 기암괴석과 절벽, 산봉우리 등 수려한 경관을 가슴속으로 빨아들일 수 있는 곳에 솟아 있다. 계곡물을 낀 초간정은 소나무와 참나무 등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큰 바위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금선정도 큰 바위(금선대) 위에 앉아 소나무 숲과 계곡을 품에 안고 400년을 이어오고 있다.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이 사간원 사간에서 파직된 뒤 은거생활을 위해 지은 별서정원이자, 긴 계곡과 주변 산봉우리들로 둘러싸인 산수정원이기도 하다.

◆궁궐 정원

안압지(경주시 인왕동)와 포석정(경주시 배동)은 신라시대 대표적인 별궁의 정원. 안압지는 삼신산을 상징하는 세 개의 둥근 섬과 아름드리 꽃, 나무, 호안석축 등이 볼거리다. 조명을 받은 안압지 야경이 일품이다. 물고기를 말린 모양의 포석정은 신라 임금의 놀이터로 만든 별궁에 딸린 유적으로, 자연의 맛보다는 다분히 인공적이다.

◆한·중·일 정원의 대비

일본과 중국이 자연을 끌어들이는 방식이라면 한국은 자연으로 들어가 그 속에 안기는 방식을 택했다. 일본과 중국이 자연을 모방해 이를 인공적으로 재현하려 했다면 한국은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둔 채 즐기려는 모양새를 갖췄다. 특히 한국은 정원과 자연의 경계를 거의 느끼지 못할 만큼 '자연과 인간의 일체화'를 추구했다는 것.

일본의 전통 정원은 좋은 자연경관을 그대로 모방해 미니어처처럼 조성한 게 특징이다. 산과 바위, 모래와 물의 크기, 비례, 균형 등을 고려한 고산수(枯山水) 기법을 구사해 한 폭의 그림처럼 꾸몄다. 건축물의 문과 창을 액자로 삼아 바깥 풍경을 그림처럼 감상할 수 있도록 한 차경(借景) 수법도 활용했다. 오카야마현의 후락원(後樂園), 이시카와현의 겸육원(兼六園), 이바라키현의 해락원(偕樂園), 교토의 용안사(龍安寺) 등이 대표적이다.

중국의 정원은 대규모의 인위적 공간으로 꾸몄다. 돌을 쌓아 올려 만든 석가산, 태호석으로 만든 바위 풍경, 거대한 연못 등을 특징으로 한다. 아치 모양을 비롯한 다양한 돌다리와 현란한 장식 문양 등도 주요 요소다. 북경의 이화원, 승덕의 피서산장, 소주의 졸정원과 유원, 성도의 두보초당 등을 들 수 있다. 피서산장 564만㎡, 이화원 290만㎡, 졸정원 5만㎡ 등으로 방대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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