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상을 버린 두 남녀 이야기…김씨표류기

영화는 사람과 참 많이 닮았다. 누군가에게 사람을 소개할 때, 이러쿵저러쿵 꽤 긴 사전 설명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저 '한번 만나 봐. 보면 알거야'하며 일단 만남부터 권하게 되는 사람도 있다. 영화 '김씨표류기'는 후자다. 먼저 봤다고 자랑하며 말할 수 있는 영화도 좋지만 '같이 봤으면 좋았을텐데'라며 아쉬워하는 영화 역시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김씨표류기'는 결코 '대단한' 영화는 아니다. 가슴 뻥 뚫리는 대작 액션도 없고, 눈물 콧물 범벅이 돼 줄줄 흘러내리는 감동 스토리도 아니다. 그런데 참 매력있다. 영화를 보고 나서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흐뭇함이 묻어났다.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해'라며 짠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 이 정도면 살 만 하겠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정씨 성을 가진 두 배우(정재영, 정려원)가 남자 김씨와 여자 김씨로 만난 이야기를 들어보자.

◆남자 김씨 이야기

남자 김씨(정재영)는 한마디로 우리 시대의 낙오자다. 구조조정의 칼날에 '끽' 소리 못하고 두부 잘리듯 잘렸고, 대출금을 갚지 못해 허구헌날 빚 독촉 받는 게 일과다. 딱히 내로라 할 능력도 없고 토익은 700점이 채 안되니 재취업도 못한다. '착한 것보다 무능력한 게 더 나쁘다'고 말하는 여자 친구에게 길거리 빈 깡통처럼 차였다. 스스로 말하듯 '지지리 못난 놈'인 주인공이 선택할 길은 딱 하나. 세상과의 작별을 고하는 것 뿐이다. 1973년 8월 18일생 주인공은 어느 봄날, 미련없이 한강으로 뛰어든다. 그런데 '지지리 복도 없는' 김씨는 그만 살아나고 만다. 왼쪽으로 63빌딩, 오른쪽으로 국회의사당이 보이는 한강 한 가운데 밤섬에 표류하게 된 것. 궁상도 이 정도면 지지리도 못났다.

물이 무서워 수영도 못한다. 소심한 성격 탓에 지나가는 유람선을 목청껏 부르지도 못한다. 물에 젖은 휴대폰을 간신히 살려내지만 그마저 배터리가 다 돼 쓸모가 없어진다. 남은 길은 역시 하나. 죽는 것 뿐이다. 그래서 넥타이에 목을 맨다. 그런데 갑자기 배가 살살 아파온다. 참고 죽으려고 했는데 배가 아파 참을 수가 없다. 허겁지겁 수풀로 뛰어들어 설사를 했는데, 눈앞에 들어오는 사루비아 꽃 무더기. 가늘고 긴 붉은 꽃을 뜯어 뒷꽁무니에 맺힌 0.1g도 채 안되는 꿀을 빨아먹는다. 달다. 참 달다. 그리고 운다. 펑펑 운다. 침이며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될 정도로 목 놓아 운다. 밤섬 모래사장에 작대기로 썼던 'HELP'를 'HELLO'로 바꾼다. 김씨는 세상을 다르게 본다.

◆여자 김씨 이야기

여자 김씨(정려원)는 이른바 '신상녀'다. 최신 유행 패션을 하루라도 늦으면 난리날 것처럼 금세 따라하고, 얼굴도 길 가던 남자들 목운동하게 만들 정도로 예쁘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진짜 김씨가 아니다. 김씨를 대신해 사이버 공간에 대화명으로 존재하는 '돌로레스'일 뿐이다. 실제 김씨는 벌써 3년째 자기 방안에만 갇혀 사는 은둔족이다. 방 한 구석에는 그간 버리지 못한 쓰레기가 비닐 봉지에 담긴 채 그득하고, 그 옆에는 주 식량 중 하나인 옥수수 캔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그러나 은둔족 김씨도 꽤나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아버지가 출근하면 잠에서 깨고 인터넷으로 출근(하루 종일 인터넷을 돌아다니기)하고, 만보기를 차고 꼬박꼬박 운동도 한다. 퇴근(인터넷 서핑을 마치기)하면 취미 활동으로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로 달 사진을 찍는다. 달에는 사람이 없고, 사람이 없으면 외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람이 없어야 외롭지 않다. 외롭게 할 사람조차 없다. 김씨는 이마에 큰 흉터가 있다. 학창시절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 세상과의 소통을 그만 두고 방에 틀어박혀 자기 세계를 만든 이유도 그 때문. 일년에 두 번, 봄과 가을에 그는 세상과 만난다. 민방위 대피 훈련이 있는 날, 세상은 사람과 차량의 소란 속에서 20분 동안 고요해진다. 일년에 40분간, 김씨가 낮시간 세상을 만나는 유일한 시간이다. 바로 그 시간, 문득 밤섬을 스치듯 지켜보던 여자 김씨는 모래사장의 'HELLO'를 보게 되고, 남자 김씨의 존재를 알아차린다.

◆남자 김씨와 여자 김씨의 만남

밤섬에 표류하는 남자 김씨와 아파트 숲속 혼자만의 방에서 표류하는 여자 김씨. 'HELLO'에서 'HOW ARE YOU?'로, 그리고 'I AM FINE. THANK YOU. AND YOU?'로 이어지는 지극히 초보적인 대화. 남자 김씨는 모래사장에 글을 새기고, 여자 김씨는 밤을 틈타 한강 다리로 올라간 뒤 밤섬을 향해 포도주병에 담긴 메시지를 던짐으로써 둘의 대화는 이뤄진다. 어찌보면 무척 황당스러운 설정이지만 이 둘의 만남은 결코 억지스럽지 않다.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그리고 드디어 등장하는 물음표. 'WHO ARE YOU?'(넌 누구냐?)

이제 껍질을 깨고 나올 시간이 됐다. 하지만 쉽지 않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세상을 버린 두 남녀의 커밍아웃은 쉽지 않다. 세상과 마주보기를 시도하는 둘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체는 우습게도 자장면(사실 짜장면이라고 해야 제 맛이 나건만)이다. 밤섬에서 옥수수를 키워 가루를 낸 뒤 자장면을 만드려는 남자 김씨와 밤섬까지 자장면을 배달시켜 주는 여자 김씨. 다리에 알이 배기도록 오리배를 타고 가서 자장면을 전해준 중국집 배달원에게 남자 김씨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자장면을 거부하며 이런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자장면은 희망"이라고. 배달된 희망 대신 스스로 찾는 희망을 갖겠다는 메시지. '천하장사 마돈나'를 연출했던 이해준 감독은 '세상과 소통하기'라는 다소 까다로운 주제 속에 자장면을 제법 맛깔나게 버무려 넣었다. 웃음과 울음도 자장 소스만큼이나 감칠맛나게 집어넣었다. 영화는 톰 행크스가 주연한 '캐스트 어웨이'(1998년)을 떠오르게 하지만 사뭇 다른 느낌을 전한다. 톰 행크스에게 배구공 '윌슨'이 있었다면 정재영에게는 '오뚜기' 깡통 허수아비가 있다. 세상과 동떨어진 무인도에 남게 된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하겠느냐고 친구에게 물었더니 '인형 만들기'라고 답했다. 사람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인생의 바다 위를 표류하며 산다. 인형이 아닌 사람과 소통하며 표류할 수 있다면 한 번쯤 살아볼 만 하지 않을까?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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