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변한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오늘날 평가하는 것도 어떤 관점에서 조명하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이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사태의 본질을 꿰뚫는 '역사의 눈'이 필요한 것이다.
조선 초기 태종 시절, 조정은 울릉도·독도의 운영 방안을 놓고 어전회의에서 갑론을박했다. 울릉도·독도는 동해 한가운데 있어, 국가의 권력을 행사하기에는 행정 부담이 크고, 버려두자니 왜구들의 침략 전초기지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독도·울릉도의 역사' 김호동 저).
"우의정 한상경, 육조·대간에 명하여 우산·무릉도의 거민(居民)을 쇄출(刷出)하는 것의 편의 여부를 의논케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무릉의 주민은 쇄출하지 말고, 오곡과 농기를 주어 그 생업을 안정케 하소서. 인하여 주수(主帥)를 보내어 그들을 위무하고 또 토공(土貢)을 정함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공조판서 황희(黃喜)만이 유독 '불가하다' 하며 '안치시키지 말고 빨리 쇄출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쇄출하는 계책이 옳다… 그곳 주민을 거느리고 육지로 나오게 함이 마땅하다' 했다."('태종실록' 태종 17년 2월).
태종은 황희의 의견을 좇아 '무릉등처안무사'를 보내 우산·무릉도의 주민을 모두 육지로 데려나오기로 결정했다. 이 때 이후 조선은 두 섬에 대하여 줄곧 쇄환(刷還)정책을 유지했다. 그러나 부역과 조세를 피하고자 하는 동해 해안가 사람들이 물산이 풍부하고 농사가 잘 되는 우산·무릉도로 끊임없이 들어갔다. 조정에서 관리를 보내 감독하는 사업 역시 반복되었다.
세종조에는 강원도 평해고을 사람 김을지 등 28명이 섬에 도망가 살면서 몰래 작은 배를 타고 평해군 구미포로 왔다가 발각되었다. 이에 김인우가 군인 50명을 거느리고 가서 남녀 20명을 수색해 잡아왔다.
성종 연간(1469~494년)에는 우산·무릉도를 무릉도원으로 인식하여 한때 '요도(蓼島)' '삼봉도(三峰島)'라고 부르기도 했다. 왜구 침탈 위험이 줄어들자 관권의 횡포를 피해 많은 주민들이 무릉도원을 찾아 나섰다. 이에 성종은 삼봉도 경차관에 박종원을 임명하여 주민들을 쇄환해 나오도록 명한다. 이즈음 조선 조정은 이미 '신증동국여지승람'(1531년 편찬)에서 보는 것과 같이 독도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릉(武陵)이라고도 하고 우릉(羽陵)이라고도 한다. 두 섬이 고을 바로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세 봉우리가 곧게 솟아 하늘에 닿았는데 남쪽 봉우리가 약간 낮다. 바람과 날씨가 청명하면 봉 머리의 수목과 산 밑의 모래톱을 역력히 볼 수 있다. 순풍이면 이틀에 갈 수 있다. 일설에는 우산·울릉이 원래 한 섬으로서 지방이 백리라고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45)
그러나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조선왕조의 통치력이 극도로 약화되어, 울릉도·독도를 돌볼 여력을 갖지 못하였다. 이에 울릉도에 들어간 사람들은 왜(倭)의 분탕질에 정착하지 못한 것으로 이수광의 '지봉유설'은 기록하고 있다.
조선이 임진왜란의 전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1618년(광해군 10년),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는 오오다니(大谷甚吉)와 무라카와(村川市兵衛) 두 가문에 죽도(울릉도) 도해면허를 내준다. 또 오오다니가는 1656년경 막부로부터 송도(우산도·독도) 도해면허도 획득했다. 이 도해면허는 일본 국경을 넘어 '외국'에 가서 활동할 수 있는 통상(通商)면허장이었다.('독도 보배로운 한국 영토' 신용하 저).
일련의 조선 초기 정책과 관련 일본인 기타자와(北澤正誠)는 '죽도고증'(竹島考證·1881년)을 통해서 "죽도는 예전부터 사람이 살지 않는 거친 섬으로서 70여년간 우리나라 사람이 그곳에서의 해상이익을 독차지해 왔는데 원록(元祿)시대에 그 섬을 돌려주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조선이 '공도제'(空島制, 일명 공도정책)를 시행하여 '빈 섬'이었다고 주장하고 "일본은 '주인 없는 빈 땅'을 차지했다"는 논지를 전개하고자 했다.('독도·울릉도의 역사' 김호동 저).
태종 이후 조선이 우산·무릉도 주민을 쇄환하여 왜국의 침탈을 막고자 함은 확인된 것과 같지만, 조선왕조는 결코 두 섬에 대하여 행정력 행사를 포기한 적이 없다. 이 때문에 '공도정책'은 전혀 합당하지 않을 뿐더러 영토침탈 야욕의 낚싯바늘을 숨긴 미끼인 것이다. 그런데도 일부에서는 일본인 사가(史家)가 주장한 공도정책을 사실인양 생각 없이 쓰고 있다. 역사를 직시할 일이다. 전충진기자 cjje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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