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욱(57'대구 남구 대명9동)씨는 소리하는 택시기사이자 시'수필'산문을 쓰는 문학인이다. 1988년 '제1회 대구국악제'에서 장려상을 받았으며, 98년 서울 순수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도 했다.
시집 '떠가는 저 구름은' '아침 태양', 산문집 '건강촛점' 등을 펴냈으며 2007년에는 현대시에 직접 곡을 붙인 시창 CD도 발매했다. 택시 안에 모금함을 설치, 어려운 사람에게 모금함을 부어주는 운동도 펼쳤으며 경로당'양로원 등에서 판소리 자선공연도 가져 1994년 노동부장관상과 2004년 국무총리상까지 수상했다. 명함을 받으면 국악인'문학인으로 걸어온 그의 인생 여정을 나타내는 문구가 빼곡히 적혀 있다. 하나의 재주도 타고나기 힘든데 그는 여러 재주를 지닌 덕분에 1인 3역의 바쁜 인생을 살고 있다.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지만 고등학교 때까지 임씨의 꿈은 성악가였다. 하지만 몸이 허약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꿈을 접어야 했던 것이 가슴속 응어리로 남았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들은 판소리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소리를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 "판소리는 한을 토해내는 음악입니다. 판소리는 제 가슴 속 답답함을 풀어내는 도구였습니다." 그는 혼자서 소리를 흥얼거리다 26세 때 인간문화재 고 원광호 선생을 만나 2년간 판소리를 배우면서 정식으로 입문했다. 그 뒤 30여년 넘게 판소리를 독공하고 있다. 한창 연습할 때는 시청각 자료를 활용해 듣고 보고 따라 하기를 하루에 수십번 했다. 틈만 나면 대덕산에 올라 4, 5시간씩 소리를 쏟아 냈다.
판소리가 좋아 판소리국악원도 열었다. 몇 번이나 문을 열었지만 돈에 대한 애착이 없어 번번이 실패했다. 그래서 생계를 위해 나이 40에 택시운전대를 잡았다. 임씨는 판소리 다섯마당 가운데 '적벽가'를 가장 좋아한다. 실패와 고난의 연속이었던 자신의 인생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의 택시에는 '소리하는 택시기사 임재욱, 행운 시 한 장 가지고 가십시요'라는 문구가 걸려 있다. A4 용지에 출력한 시를 나눠주고 손님이 원하면 판소리 한 소절도 들려준다. 그의 택시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 서비스다. 손님들의 반응도 뜨겁다. "이런 택시는 처음 봤다" "감명 깊다" "행운을 얻어 가는 것 같다" 등 다양하다.
임씨의 필력은 판소리 경력보다 몇 년 앞선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건강관리를 위해 전국의 명산을 두루 다니며 느낀 감정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글쓰기와 판소리는 제게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판소리로 한을 풀어낸 뒤부터 글이 더 부드럽게 나왔습니다."
그는 택시운전도 자신의 성격에 꼭 맞다고 했다. "불교는 제게 중요한 영적 대상입니다. 한때 출가를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출가는 속세와의 인연이 끝나야 할 수 있습니다. 속세와의 인연을 벗어나지 못해 출가를 못한 제 마음속에는 수행승처럼 여기저기 다니고 싶은 욕망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여기저기 다니는 택시운전과 구름처럼 떠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제 성격은 상통합니다."
임씨는 현재 '숨어 부른 판소리'라는 장편소설을 집필 중이다. 소재는 바로 자신의 인생. 3대 독자로 곱게 자란 그가 판소리를 한다고 했을 때 가족들의 반대가 심했다. 그래서 그는 소설 제목처럼 몰래 숨어서 판소리를 불렀다. "처음으로 소설을 쓰는데 시와 달라서 쉽지 않습니다. 특히 심리를 묘사하는 일이 어려워 소설 쓰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는 택시를 모는 틈틈이 시간을 내서 소설 자료를 정리한다. 글이 막히면 가끔 대덕산에 올라 판소리를 부른다. 또 자신이 작곡한 시창으로 콘서트를 열겠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임씨는 밖에서는 인기가 많지만 집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젊은 시절 부인(56)과 다툼도 많았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부인이 나이 쉰을 넘기면서 자신을 이해주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던 주변 사람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가치관을 존중해 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꿈을 위해 끊임없이 달려온 그가 인생을 돌이켜보면 후회되는 것이 딱 한 가지. 바로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다. 지난해 15년 2개월 무사고 기록으로 개인택시면허를 신청했지만 개인택시면허가 묶이면서 그것마저 날아갔다. 가족들을 위해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아쉬움도 많았다. "가족들 호강 한번 못 시켜 주고 여행 한 번 제대로 못 간 것이 늘 마음에 걸립니다. 언젠가는 꼭 보답을 해주고 싶습니다." 여러 가지 일을 하자니 몸과 마음이 모두 바쁘고 고달프지만 희망이 없으면 시체와 같다는 그는 새 희망을 펼치기 위해 오늘도 달린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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