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남희의 즐거운 책읽기]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십수년 전 송시열이 은거하던 충남 괴산의 화양계곡에 간적이 있다. 때는 농익은 가을, 송시열이 어떤 인물인지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화양계곡의 단풍은 참으로 붉고 고왔다. 이덕일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읽으면서, 그 화양계곡이 떠올랐다. 당대뿐 아니라 죽은 지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가 드리운 그늘이 가시지 않았다고 말해지는 송시열, 그가 꿈꾸었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송시열이 살았던 16세기 말에서 17세기 말은 정치적 격변기였다. 정치적 격변뿐만 아니라 사회'경제분야도 거대한 변화를 겪었던 시기이다. 농업과 상공업이 발달하였고, 일부 국제무역업이 발전하기도 했다. 17세기 말 5일장으로 불리던 전국의 장시가 무려 1천여개에 이르렀고, 보부상과 화폐가 발달하였다는 사실이 당시의 경제변화를 보여준다.

경제분야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신분제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토록 강고하던 신분제의 벽에 틈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조선사회는 근본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양반의 특권적 지위를 폐지하고, 농민과 노비에 대한 신분 억압을 철폐하는 것이 시대의 요구였다. 만약 조선이 그런 길을 걸었다면, 조선후기의 역사는 훨씬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었으리라.

하지만 송시열은 그런 길을 걷지 않았다. 그는 주희의 주자학이 구현되는 예학의 나라를 꿈꾸었다. 그리고 그들이 꾼 꿈은,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사람들이나 일반 민중들과 크게 달랐다. 그것이 비극이었다.

중국 송나라의 주희가 주자학을 만든 것은 사대부 계급의 성장과 이익 추구라는 사회적 배경이 있었다. 그것은 주희의 시대에는 필요했으나 조선 중기에는 맞지 않았다. 조선 초'중기 사회 변혁의 사상이었던 성리학이 인조반정 후 수구사상인 예학으로 나간 것은 송시열이 주도한 것이었다. 예학을 두고 서인과 남인이 크게 붙은 것이 예송논쟁이다. 효종의 죽음에 대비가 상복을 얼마동안 입어야 하느냐로 촉발된 제1차 예송논쟁은 많은 피를 뿌렸고, 조선을 당파싸움의 회오리로 몰고 간 발단이 되었다.

송시열은 소중화사상을 주자학의 조선화로 생각했겠으나 중요한 것은 소중화란 명분론이 아니라 사회발전에 맞게 학문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송시열은 결국 사대부 계급의 이익과 노론의 당익을 지키는 데 목숨 걸어 백성들의 나라가 아닌 그들의 나라를 세운 것이다. 그가 현실 정치에 몸담는 대신 학문만 닦았다면 아마도 많은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신봉했던 주자학은 당시 조선에서 이미 학문이 아닌 정치적 도그마가 되어 있었다. 그의 비극은 상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절대성의 비극이자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도 파괴하는 전체성의 비극이었다. 왕도 꼼짝 못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자랑했던 그도 장희빈 소생의 왕자를 원자로 정호하는 사건으로 정치적 몰락을 맞게 된다.

오늘날 학교에서는 '북벌=송시열'이라는 도식을 아직도 외우고 있다. 실제 북벌론자 윤휴가 죽은 후 송시열의 당인 노론은 윤휴가 아닌 송시열을 북벌론자로 추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 멸망과 일제강점기, 해방 후까지 이들 중 상당한 세력이 온존함에 따라 진실과 동떨어진 역사가 반복적으로 주입되고 있는 것이다.

역사가가 선택해 기술하는 사실이 역사가 된다는 서양의 역사가 카의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이 책의 저자 이덕일은 역사연구의 성과를 대중과 함께 나누는 작업을 시도하여, 한국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는 이다. '사도세자의 고백' '누가 왕을 죽였는가' 등 그의 책들은 우리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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