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여성 in 여성]박언휘종합내과 박언휘 원장

봉사도 중독이 되는 걸까. 박언휘종합내과를 운영하는 박언휘(50) 원장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일엔 업무를 마치고 장애인 집을 일일이 찾아가 무료 진료하고 일요일엔 교회를 찾아가 노약자들이나 어린이들에게 진료 봉사를 한다. 그것도 수십년 동안 이어와 그녀의 일상생활이 되었다.

"사실 빨간 날에 무료 진료를 가려고 하면 몸이 피곤하죠. 하지만 아파서 찡그리는 어르신이나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밟혀요. 혹 진료를 가지 않은 날엔 온종일 기분이 우울해지죠." 그런 그녀에게 '2009 대한민국 사회봉사대상'이 주어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그는 바로 '천사표 의사'다.

박 원장은 인터뷰 도중 슈바이처 박사를 여러 차례 언급했다. 한마디로 '롤모델'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의사라면 한 번쯤 꿈꾸는 슈바이처 박사. 존경하는 인물로 다소 상투적일 수 있지만 그녀의 어린 시절은 슈바이처를 꿈꾸기엔 필요충분조건을 갖추었다.

울릉도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해 병을 달고 살았다. 시름시름 앓는 것이 습관이 될 정도였다. 그녀는 당시 열악한 의료 환경 탓이라 여긴다. 병원조차 없던 울릉도에서 유일한 희망은 외국 선교 의사들이었다. "처음엔 외국인들이 너무 무서웠어요. 하지만 자주 아파 수시로 그들과 마주치다 보니 자연스레 친해졌죠. 덕택에 영어를 많이 배워 도시의 또래들보다도 영어를 잘했어요."

당시 병치레는 그녀만의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사소하게 여겨지는 병 때문에 주위에 죽어나가는 아기들이 많았다. 어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의료 환경이 취약해 치료를 하지 못해 합병증으로 확산되는 것이 원인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박 원장은 자연스레 의사의 꿈을 마음속에 심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극구 반대였다. 밤에 책을 읽으면 전깃불을 와락 꺼버리기도 했다. "부모 입장에선 워낙 병치레를 많이 하니까 그냥 건강하게 자라 시집가는 것이 소망이었죠. 병치레에 너무 시달렸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책을 읽을 정도로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초등학교 졸업할 쯤엔 세간에 출간된 세계문학전집들은 모두 읽었다. 공부는 항상 1등이라 울릉도에서 천재로 통했다. 울릉도에서 대구여고로 입학할 때도 당시 고교 합격이 힘들 거라는 예상을 깨고 1등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대학에 입학하고 '슈바이처'를 한때 잊기도 했다. 그 전까지 느껴 보지 못했던 낭만과 자유가 그녀를 사로잡은 것. 하지만 예과 2학년 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그녀는 정신이 바짝 들었다. "갑자기 공납금을 내야 하는데 집에서 돈이 안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집에 찾아갔더니 가구마다 빨간 딱지가 붙어 있었어요. 세상이 일순간에 확 달라졌죠. 모두 흥청망청하던 성탄절 이브 때였죠.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우울증과 절망감이 밀려왔어요. 잠시 극단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죠."

극단적 생각이 그녀의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됐다. 주위에 자신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고 그로 인해 다시 '슈바이처'가 가슴속에 새겨졌기 때문이다.

졸업하자마자 성주보건소로 향했다. 재학 중에 받은 장학금을 갚기 위한 하나의 대가성이었지만 그녀는 월급을 받으면 찾아오던 특정 환자들에게 일일이 계란 한 판씩을 나눠 줬다. 하지만 그녀가 봉사라는 본격적인 길을 걸은 것은 1995년 포항에서 근무하고 부터다. "내과를 좀 더 전문적으로 배우기 위해 미국에서 6년 정도 공부를 했죠. 그런 뒤 한국으로 돌아와서 보니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도 찾았고 평소 생각하던 무료 진료를 해도 되겠구나 싶었어요." 매주 일요일 교회를 빌려 주민들에게 무료 진료를 시작한 것이다.

장애인 집을 찾아 무료 진료를 하기 시작한 것은 1998년쯤. 한 할머니가 올 때마다 자신이 필요한 약 외에 약을 더 타 가는 것이었다. 당시 노인들의 약 남용이 심한 때였기 때문에 박 원장은 그러지 말라고 꾸짖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3층 다락방에 옴짝달싹 못하는 장애인 아들을 위해 약을 타 가는 것이었다. "그 상황을 접하고는 너무 미안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름 봉사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너무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구나 싶었죠. 봉사한다고 생각한 자체가 사치로 여겨지더라고요."

그녀는 진료 봉사를 통해 처음에 아파서 인상을 찌푸리던 환자들이 환하게 웃을 때, 또 고맙다고 자신의 손을 잡을 때 표현할 수 없는 뿌듯함이 느껴진다고 한다. "보통 봉사하는 의사들을 보면 지쳐 보이거든요. 인상도 굳어있고요. 그러면 환자들은 부담스럽고 불편해요.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에서 혈혈단신 봉사를 하면서도 항상 웃으면서, 또 기쁜 마음으로 했어요. 나름대로 취미 생활도 즐기면서요. 그런 모습이 제가 슈바이처를 존경하고 좋아하는 이유죠."

전창훈기자 apolonj@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