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종문의 펀펀야구] 심정수가 갈 길에 행운이 깃들길…

살다 보면 누구나 한번은 고향을 떠나게 되고 그러다 세월이 흐르면 객지가 고향이 되기도 한다. 타향에 정착해 성공한 사람도 많겠지만 프로야구 선수에게 타향의 벽은 실로 높기만 하다.

서울 출신으로 대학 대신 OB 베어스(현 두산)를 스스로 선택했던 심정수는 입단 2년차에 21개의 홈런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후 3년간 부진했던 심정수는 하루 50개의 계란을 먹고 웨이트 트레이닝에 전념하면서 근육질의 몸매로 다시 태어나 1998년부터 3년간 타이론 우즈, 김동주와 함께 역대 최강의 클린업 트리오로 활약했다. 심정수는 비록 3인자였지만 두산의 주축 선수로 거듭났고 이대로라면 그는 영원히 두산의 영웅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이었을까? 호사다마(好事多魔)의 시련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2000년 시즌이 끝나고 선수협 결성의 주역이 된 심정수는 공적(?)으로 몰려 현대의 심재학과 트레이드되면서 처음으로 고향을 떠났다. 떠미는 운명과 맞서 44개의 홈런을 치겠다는 의지로 등번호 44번를 달았던 심정수는 2001년 시즌 롯데 투수 강민영의 볼에 맞아 광대뼈가 함몰되는 부상을 당하며 큰 위기을 겪었다.

하지만 2002년 검투사 헬멧을 부착하고 시즌 막판까지 이승엽과 홈런왕 경쟁을 벌이면서 타석의 헤라클레스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유리한 고지로 앞서가던 생애 첫 홈런왕의 도전은 막판 2개를 몰아치며 47개를 기록한 이승엽에게 내주며 무산되고 말았지만 야구팬에게 심정수란 존재를 분명하게 인식시킨 계기도 됐다.

이듬해 절치부심 도전해 또 한번의 홈련왕 대결로 야구판을 뜨겁게 달구었지만 아시아 홈런 신기록을 달성한 이승엽에 그의 53개 홈런의 대기록도 그늘 속으로 가려지고 말았다. 그러나 2004년 시즌까지 현대 우승의 주역으로서 투수들이 가장 기피하는 대형 타자로 전성기를 누렸고 마침내 2005년에는 4년에 60억원이라는 국내 최고 대우의 자유계약선수(FA)로서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했다.

그렇지만 그의 두 번째 타향살이는 이후 4년 동안 부상의 휴우증을 극복하는 데 실패하면서 순탄치 못했다. 고통을 감내하며 마지막 투혼을 쏟았던 그의 의지와는 달리 '먹튀'라는 오명과 함께 그동안 쌓아온 그의 명성은 조금씩 반감되었고 15시즌 통산 328개의 괄목할만한 홈런 기록의 보유자이면서도 영광스런 은퇴식조차 갖지 못하고 부초처럼 쓸쓸히 무대를 떠나고 말았다.

만약 심정수가 고향을 떠나지 않고 두산에 남았다면 그의 야구 인생은 어떻게 달랐을까? 어쩌면 그는 지금쯤 두산의 별이 되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처음 인연을 맺은 구단에서 끝까지 남아 은퇴하는 일은 모든 프로야구 선수의 꿈인 것이다. 연고지 스타로 업적을 남기고 영원히 갈채를 받는 선수는 어쩌면 신의 축복을 받은 삶이다.

지난 주 심정수는 미국행 비행기에 새로운 꿈을 실었다. 세 번째 타향인 아틀란타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어하는 그에게 행운을 빈다. 야구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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