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울릉·독도는 조선땅, 일본 출어말라" 안용복의 1차 渡日

[여기는 독도] 역사④-안용복 1차 渡日

▲ 안용복이 1차 도일(渡日)하기 100년 전 1592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령으로 제작한
▲ 안용복이 1차 도일(渡日)하기 100년 전 1592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령으로 제작한 '조선국지리도'. 울릉도와 우산도가 표시되어 있고 대마도도 우리 영토로 표기해놓고 있다. 울릉도 독도박물관 제공

1658년생. 부산 좌천동 거주. 아주 작은 키(4척 1촌). 가무잡잡한 피부에 마마자국으로 심하게 얽은 얼굴. 좌수영 소속 노 젓는 수졸 복무 경력의 어부. 장군도 아니고 벼슬아치도 아니면서 독도를 지켜낸 위인. 안용복의 신상명세이다.

숙종 19년(1693년) 봄, 안용복은 울산·동래의 어부 40여명과 함께 울릉도로 고기잡이하러 들어갔다. 울릉도에는 이미 왜인들이 몰래 들어와 고기를 잡고 있었다. 양국의 어부들은 시비가 붙었고, 왜인들은 '괘씸한 말투로 말하는 우두머리와 그 밑에 있는 자' 즉 안용복(당시 42세)과 박어둔(당시 24세)을 불러내 일본으로 데리고 갔다.(이케다 가문 문서)

이튿날 일본 어부들과 오키도(隱岐島)에 도착한 안용복은 "울릉도와 자산도(子山島·독도)는 조선의 땅으로 조선 사람이 조선 땅에 들어왔는데 왜 잡아 왔는가"라며 오키도주에게 따졌다. 이에 오키도주는 안용복과 박어둔을 호키주(伯耆州) 태수에게로 보낸다.

여기서도 안용복은 호키주 태수의 심문에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강조하고, 울릉도에 일본 어부들의 출입을 금지해 줄 것을 요구했다. 당시 호키주 태수는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알고 있었기에, 유력가의 집 별채에 머물게 하면서 술을 들여보내는 등 회유를 하려고 했다. 두 달 동안, 안용복이 끝내 뜻을 굽히지 않자 결국 막부(幕府)에 조선인을 데리고 온 사실을 알리게 되었다.('독도를 지키는 사람들' 김병렬 저)

막부에서도 여러 가지 조사를 한 결과, 안용복의 주장이 사실임을 인정했다. "울릉도와 자산도는 일본 땅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 어민들의 출어를 금지시키겠다"는 서계(書契)를 써주며 조선과 우호관계를 해칠지 모르기 때문에 조선인을 당장 귀국시키도록 명했다. 이에 안용복과 박어둔은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귀국길에 올랐다.

1614년부터 '울릉도를 살펴보겠다'며 '길 안내를 내어달라'고 요구해온 대마도주는 울릉도 침탈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안용복 사건이 터진 것이다. 대마도주는 막부가 써준 서계가 조선 조정에 전달되면 울릉도를 넘볼 수 없게 된다고 판단하고 하마다란 심복을 나가사키로 보내 안용복 일행을 심문하고 서계를 빼앗아버린다.(일본 문서 '어로일기')

다시 안용복 일행이 나가사키로부터 대마도로 오자 50일간 감금한 다음, 안용복 등을 죽도(竹島·다케시마)를 침범한 죄인으로 묶어, 부산에 있던 왜관으로 데리고 가서 다시 40일간 더 억류한 후 동래부로 인계했다. 이 때 대마도주는 안용복을 호송하는 길에 막부의 뜻을 대신한다면서 다치바나 마사시게(橘眞重)를 사절로 임명해 '죽도' 운운하는 서찰을 조선 조정으로 보냈다.

서찰에는 동해에 울릉도가 아니면서 울릉도와 비슷한 별도의 일본 영토 '죽도'가 있는 것처럼 지어내어 "이제 이후로는 일본 영토인 죽도에 조선 선박이 들어오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터이니 귀국도 (조선 어민의 죽도) 출어를 엄격히 막아달라"(숙종실록)는 요구를 담았다.

이는 대마도주가 울릉도가 죽도임을 잘 알면서 조선 조정으로부터 죽도가 일본 땅이라는 문서를 받아 울릉도를 분쟁지역화 하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는 것이었다. 서찰과 함께 동래부로 넘겨진 안용복은 서계 강탈사건과 그간의 사정을 소상히 보고했지만 동래부사는 그를 '월경(越境) 죄인'으로 몰아 감금해버린다.

대마도주의 간계가 담긴 서찰을 받은 조선 조정은 강경대응론과 온건대응론이 대립했다. 결국 일본과의 정면충돌을 피하기 위해 좌의정 목래선, 우의정 민암 등 집권파의 주장대로 온건대응하기로 결정되었다.

"우리나라 경지(境地)인 울릉도일지라도 역시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임의로 왕래를 허락하지 않거늘 어선이 감히 귀국의 경지 죽도(竹島)에 들어갔기 때문에 영송하는 번잡함에 이르고…"라고 조선 조정은 회신했다. 이는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천명하고 일본이 말하는 죽도가 울릉도임을 알면서도 별개의 섬인 것처럼 하여 모른 채 한 것이다.

회신을 받아든 다치바나는 '우리나라 경지 울릉도'라는 문구가 들어있어 울릉도 점거에 차질을 빚게 되자 그 문구를 빼줄 것을 요구하며 15일간 버티다가 돌아갔다. 안용복의 도일 사건으로 조선 조정은 울릉도와 자산도에 대한 수토(守土)정책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안용복과 박어둔은 '월경 죄인'으로 옥고를 치르고 풀려났다. 전충진기자 cjjeon@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