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뉴욕에서 활동하는 변종곤 화가가 대구에 왔다. 그는 1981년 처음 미국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얘기하면서 "그런 상처가 없었으면, 현재의 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화가'는 화가 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예술가는 천성적으로 상처, 고통과 친한 사람이라고 했다.
시인 랭보의 말대로 상처 없는 인간이 어디 있으랴. 무수한 상처를 받으며, 또 주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도 멕시코 여류화가 프리다 칼로(1907~1954)만큼 육체적, 정신적으로 상처를 많이 받은 이도 드물 것이다.
1925년 9월 17일 오후, 작은 체구에 짙은 눈썹의 18세 소녀가 남자친구와 버스에 오른다. 18세면 이제 갓 피어나는 꽃이다. 가슴에는 사랑이 피어나고, 환희와 설렘, 두근거림이 충만한 나이다.
그러나 한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이 소녀는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면서 온몸이 부서져 버렸다. 병원에 실려 온 소녀의 몸은 참혹했다. 버스 손잡이 쇠파이프가 몸 한복판을 관통했다. 옆 가슴을 뚫고 들어와 골반을 통해 질을 뚫고 허벅지로 나왔다. 의사들은 세 군데의 요추 골절, 쇄골 골절, 제3, 4늑골 골절, 세 군데의 골반 골절, 어깨뼈 탈구, 그리고 12군데나 골절된 오른쪽 다리와 비틀리고 짓이겨진 오른발을 발견했다.
그녀의 몸은 완전히 망가졌다. 석고 틀 속에 꼼짝없이 갇혀 지냈고, 퇴원 후에도 학교에 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7세 때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게 된 그녀는 그날 사고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29년 동안 35번의 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렇게 기구한 일이 있을까. 손에 가시 하나 박혀도 아프고 신경이 쓰일 일인데 그녀는 마치 가시관을 쓰고, 가시로 만든 옷을 입은 것과 같은 고통 속에서 살았다.
연약한 몸을 지탱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온몸을 가두는 깁스. 그녀는 연필을 들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 그녀는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여류 감독 줄리 테이머의 '프리다'(2002년)는 헤이든 헤레라가 쓴 '프리다:프리다 칼로의 자서전'을 원작으로 한 전기 영화다. 여배우 셀마 헤이엑과 제니퍼 로페즈가 주인공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였는데, 일자 눈썹 외에도 프리다의 외모와 흡사한 셀마 헤이엑이 타이틀 롤을 맡았다. 그녀는 제작에도 참여하는 등 영화에 열정을 보였다.
줄리 테이머는 연극, 오페라, 뮤지컬, 인형극,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감독이다. 1997년 초연된 뮤지컬 '라이언 킹'으로 여성 최초로 토니상 연출상을 받기도 했다. 예술적 안목으로 프리다 칼로의 인생을 역동적으로 그려냈다.
프리다는 1907년 멕시코시티 교외 코요아칸에서 독일인 아버지와 골수 스탈린주의자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프리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독일어로 '평화'를 뜻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름과 달리 평생 평화롭지 않은 삶을 살았다.
휠체어에 의지해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그녀는 정력적인 삶을 살았다. 정치적으로 사회주의자였으며 또한 양성애자였다. 그래서 문란한 성생활도 즐겼다. 술과 진통제, 그리고 그림이 그녀의 삶을 요약할 수 있는 오브제였다.
여사제처럼 전통 의상과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사회 관습을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에게는 20세기 여성의 우상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그녀의 작품에는 자화상이 많다. 그림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보려는 노력이었다.
그림에는 우울한 내면과 고통스런 재앙이 그대로 담겨 있다. 특히 탯줄과 같은 줄을 단 여성, 배를 가르고 태아를 끄집어내는 그림 등이 곧잘 등장한다. '헨리포드 병원' '나의 탄생' '프리다와 유산' 등의 작품이 그렇다.
그녀가 참으로 고통스러웠던 것은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유산도 세 번이나 했다. 더구나 멕시코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인 남편 디에고 리베라는 지독한 바람둥이였다. 끊임없는 여성 편력은 그녀를 견디기 어렵게 했다.
그럴수록 그녀는 더욱 그림에 몰두했다. "나는 병이 난 것이 아니라 부서졌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행복했다"고 술회한 대로 그림은 모르핀으로도 달랠 수 없었던 고통을 어루만지는 영혼의 작업이었다.
갖가지 염문을 뿌리고 다리 절단, 계속되는 척추 수술, 강철 코르셋을 착용한 몸 등 삶과 치열하게 싸워온 그녀는 1954년 스스로 세상을 놓았다. 그녀가 죽기 하루 전인 7월 12일 일기에는 '나는 더 이상 고통스런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라고 쓰여 있다.
1970년 페미니즘 운동이 대두되면서 그녀의 존재가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했고, 1984년 멕시코 정부는 그녀의 작품을 국보로 분류했다.
김중기 객원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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