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팔조령, 고령 금산재, 영주 죽령, 안동 암산터널.
'여기로 오려면 반드시 나를 밟고 가라'던 길들이 추억 속에 하나씩 묻히고 있다. 새로운 길이 생기면서 이곳을 굳이 거치지 않더라도 목적지에 더 빨리, 효율적으로 다다를 수 있어서다.
지난 2000년 이후 전국적으로 새로 깔린 국도는 한 해 평균 10곳 남짓. 2차로 국도가 대부분으로 인근 주민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도 있고, 가다가 목이 마르면 휴게소가 아닌 동네가게에 들러 음료수라도 사먹는 정취가 있던 그곳. 무정차, 직행이 낯설지 않던 시절 옛 도로는 곳곳에 정류장을 갖추고 있어 소변이 마려운 이들의 해우소가 됐다. 하지만 국도가 신설·확장되면서 옛 도로는 지방자치단체로 관리가 넘어갔고 버스정류장들은 하나씩 사라졌다. 왕복 4차로 국도가 새로 깔리면서 이전 도로로 가는 길을 찾기도, 추억을 되새기기도 여간해선 쉽지 않은 것.
새 도로에 밀려 옛 도로가 된 왕복 2차로 길들.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팔조령, 청도로 통하는 길
대구에서 가창을 지나 청도로 가려면 팔조령을 넘어야 했다. 하지만 1998년 팔조령 터널이 뚫리면서 팔조령은 이제 드라이브 코스로 남았다. 라디오 주파수가 잘 안 잡힐 정도였지만 휴대폰은 잘 터지는 이곳. 구불구불 남아있는 옛 고갯길에 무작정 차를 세워놓고 다른 차가 오기를 기다리다 지쳐 담배 한 대를 다 피울 때쯤 그제야 한 대가 올 정도로 인적이 드물었다. 심지어 국도를 걸어올라가는 아낙들이 있을 정도.
물론 주말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드라이브삼아 이 길을 달리는 사람들이 일부 있긴 하다. 하지만 드라이브족들도 대부분 팔조령 터널을 지나 청도로 넘어가기 때문에 팔조령에서 휴게소를 운영하는 업주는 터널이 얄밉기만 하다. 23년째 이곳에서 휴게소를 운영하고 있는 정영식(59)씨는 "IMF는 못 느꼈어도 팔조령 터널은 느꼈다"고 말했다. 터널이 뚫리기 직전인 1997년에 비해 3분의 2 정도 매출이 줄었다는 게 그의 말이었다.
실제 이곳은 팔조령 터널이 생기기 전에는 청도행 버스가 심심찮게 서던 곳이었다. 물론 시골길이라 누구나 손만 들면 버스가 서던 시절이었지만 지금은 아예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 심지어 이곳은 청도 관광안내도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청도 이서면의 넓은 뜰이 한 손에 잡힐 정도로 가까워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물론 팔조령 터널이 수십대의 차량을 집어삼키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곳에는 연인들의 흔적이 상당수 남아있다. 서로의 사랑을 확약하자는 내용의 문구가 난간에 덕지덕지 그려져 있다.
◆금산재, 고령과 대구를 이어주던 문
대구에서 5번 국도(달성군청으로 가는 도로)를 타고 가다 위천삼거리에서 현풍 방면이 아닌 고령농산물산지유통센터 방면으로 가면 금산재를 만날 수 있다. 대구와 고령을 잇는 유일한 '고령버스'(600번)가 지나는 경로이기에 아직까지 도로의 명맥을 잇고 있다. 과거 20여년 전만 해도 이곳은 대구와 고령으로 통하는 유일한 문이었다. 지금은 고령읍민 대부분이 대구에서 고령으로 드나들 때 88고속도로를 이용하거나 2005년 생긴 위천교차로~성산대교 방면 국도(대구-진주간 26번 국도)를 애용하고 있다. 득성터널과 고령터널이 뚫리면서 금산재를 꼭 넘어야할 일이 없어졌기 때문.
이 때문에 고령을 감싸도는 회천을 건너는 다리였던 회천교를 건널 일이 거의 없어졌다. 고령에서 대구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도 26번 국도에 맞춰져 있어 차량 20대 중 1대 정도만 금산재를 이용하고 있었다.
실제 금산재는 구불구불 올라가야 했지만 낮은 고개였다. 해발 110m 정도의 금산재에는 휴게소 하나 없을 정도. 성산면 기족리 일부 마을에 사는 이들을 위해 고령버스가 어쩌다 다니고, 저쩌다 지나는 차량이 눈에 띌 뿐 산불감시초소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고령이 한눈에 들어왔다. 어딜 가든 고갯마루에서 보이는 마을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죽령고개, 강원도로 통하던 관문
죽령고개를 만나고 싶다면 대구에서 중앙고속도로를 이용, 풍기IC에서 내린 뒤 소백산 방면으로 일단 접어들어야 한다. 그 길로 1.2km 정도 가면 구불구불한 왕복 2차로 길이 나오는데 이 길이 바로 옛 도로이자 현재도 5번 국도인 도로다.
하지만 중앙고속도로의 완공으로 죽령터널이 개통되면서 5번 국도 죽령고개를 넘으려 1시간 이상 지체하는 차량은 드물다. 국내 최장터널(4.6km)인 죽령터널이 뚫렸지만 그래도 애써 죽령고개를 오르는 이들은 등산객 아니면 드라이브족들. 2001년 말 중앙고속도로 개통 전까지는 죽령까지 오는 버스가 하루 4차례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현재는 희방사~영주시내를 오가는 버스가 있을 뿐. 단양에서는 죽령까지 오는 버스가 있긴 하다. 하지만 죽령고개를 넘어가진 않는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죽령고개를 찾을 수는 없어도 죽령고개까지 오는 내내 소백산을 감상할 수 있어 눈이 즐겁다. 강원도로 가려면 모든 차량이 반드시 이곳을 지나야 했으니 강원도로 가는 여행길이 그리 지루하지만은 않았을 듯했다.
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이 만나지만, 나뉘기도 하는 이곳에는 고개를 가운데 두고 경북 영주에 휴게소가 하나, 충북 단양에 휴게소가 둘 있다. 영주에 있는 휴게소 업주 안정자(55·여)씨는 "12년째 이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데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오히려 문물이 끊겼다"며 "택배나 우편물을 단양쪽에서 받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실제 죽령고개에서는 풍기IC로 가는 것보다 단양IC로 가는 게 조금 더 가깝다. 하지만 두 길 모두 양장구절의 백미. 야간에 이곳을 찾지는 말기 바란다.
◆의성에서 안동 가는 길, 암산터널을 추억하며
옛 구안국도의 일부인 의성에서 안동가는 길은 다른 곳과 사뭇 다르다. 이곳은 다른 곳들과 달리 산자락을 굽이쳐 흐르는 도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 생긴 국도도 차로가 넓다는 것을 제외하면 사람들이 몰려 있는 마을과는 다소 떨어져 있다. 이 때문에 여전히 직행버스나 완행버스는 구도로를 이용해 승객들을 실어나른다.
또 향후 단촌IC가 중앙고속도로에 생겨 영덕 등 동해안으로 이어진다는 기대감도 있다. 구도로에서 1995년부터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김선순(58·여)씨는 "다른 길과 달리 이 길을 죽은 도로라고 말하기는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1998년 새로운 5번 국도가 시원하게 뚫렸지만 안동에서 영천, 포항 등으로 가기 위해서는 의성읍을 통과해야 하기에 왕복 2차로인 단촌면~의성읍 구간은 아침저녁으로 번잡한 구간이라는 것. 또 안동~의성 새 도로는 에둘러가는 길이기 때문에 옛 도로를 선호한다는 게 그의 말이었다.
다만 바위굴로 잘 알려진 암산유원지의 암산터널은 과거의 영화가 빛바랜 곳. 5번 국도에서 고운사 가는 길을 외면하고 5분 정도 더 달리면 암산유원지로 가는 왕복 2차로 도로가 나온다. 이 길로 들어서면 볼 수 있는 곳이 암산터널. 속칭 바위골이라 불리는 이곳은 새로운 5번 국도가 생기기 전 안동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했던 곳이다. 안동을 한번쯤 가본 이들이라면 '아하, 그 굴'이라고 추억할 수도 있다. 특히 이곳은 지방하천인 미천까지 끼고 있어 풍경이 근사하다. 이 길에 대한 기억이 있는 이들은 한번씩 이 길을 일부러 찾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은 산에서 굴러내린 돌 등이 도로에 널브러져 있는 데다 이 길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좀체로 지나지 않아 과거의 영화는 온데간데없어 안타깝다.
글·사진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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