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남교의 일본어 源流 산책 21] 가나시미(悲しみ)

인간의 슬픔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별같은 정신적인 고통에서 오는 슬픔보다도 더 슬픈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삶의 본능인 의식주 문제가 해결 안 돼서 오는 슬픔일 것이다.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가난'을 말한다.

문명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하루에 1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지구 60억 인구 중에 15억이나 된다고 하니, '가난'은 인류의 영원한 숙제인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속에서도 더욱 깊은 슬픔에 잠겨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가 살던 집이나 고향이나 나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고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가야족이나 많은 도래인들도 엄밀히 따지면 여기에 해당된다.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이들을 '도래인' 또는 '귀화인'이라고 부르지만, 오늘날에서 보면 실은 최초의 '보트피플'인 셈이다.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던 삶의 터전을 전부 잃고, 새로 시작하는 신천지의 생활에는 많은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었을 게다. 황무지를 개척하며 모든 것을 하나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야말로 먹고 산다는 원초적인 삶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그날그날을 힘겹게 살던 그들에게 있어서 '가난'이야말로 '슬픔'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가난'이란 말은 일본으로 건너가면 '슬픔'이란 뜻의 '가나시미'(悲しみ)라는 말로 바뀌게 된다.

'말에는 혼이 있다'라는 말을 되새겨 보면서 '가난'에서 '슬픔'이란 말을 끄집어 낸 고대 도래인들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본다.

애가 자라서 어른이 된다더니, 정말 요즘 애들은 더 빨리 조숙해 지는 것 같다. 애가 어렸을 때는 '이 녀석이 언제 크나?'라고 했는데, 10대가 지나면 목소리도 변하고 제법 어른스러워지는데, 이런 애들을 보면 '다 컸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다 크다'는 일본어로 '타쿠마시이'(たくましい)인데, 이는 '늠름하다. 씩씩하다'라는 뜻이다. 이렇게 다 큰 아이들은 고대에는 산에 가서 짐승을 잡거나, 적과 싸워 이겨야 되기 때문에 자연히 사나워 지는데, 여기서 '사납다'는 '스사마지이'(凄まじい)로 '무섭다, 굉장하다, 놀랍다'로 그 의미가 더 강해진다. 이렇듯 우리말은 바다를 건너면 그 의미가 깊어지고 증폭되며 강해지는데, 이는 아마 고대 도래인들의 생활상과 깊은 연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그토록 슬픈 '가나시미'를 털고 일어나, '타쿠마시이'에서 '스사마지이'로 변모해 간 고대 도래인들의 진취적이던 삶에 힘찬 박수를 보내고 싶다. 석양에 지는 태양를 바라보며 '다져가네'하고 중얼거리던 말이, 멀리 고국을 그리는 향수가 곁들여져 '황혼'이란 뜻의 '다소가레'를 만든 고대의 나그네들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 그래서 타임머신이라도 나온다면 그토록 안타깝게 그려하던 고향산천을 한 번 보여주고 싶다.

(경일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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