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황제의 무덤을 훔치다

웨난 외 지음/정광훈 옮김/돌베개 펴냄

삶에 대한 미련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류는 영혼불멸의 신화를 만들었다. 불멸의 신화를 들으며 사람들은 죽음을 삶처럼 여겼다. 그래서 죽음과 마주 선 황제와 제후, 부자들은 무덤을 '새집'으로 여기고 꾸미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무덤은 최종 안식처가 아니라 새로 시작될 삶의 요람이었다.

한대 황제는 전국에서 거둔 세금의 1/3을 능묘 조성에 썼다. 한무제의 무릉에는 금은과 주옥은 물론이고 새와 들짐승, 물고기, 자라, 소와 말, 호랑이와 표범 등 온갖 동물이 함께 묻혔다. 청대의 건륭황제는 죽은 뒤 수 많은 보물을 몸에 걸치고 머리에 썼다. 반세기 동안 중국을 통치한 자희태후(서태후)는 생전에 인간의 영화를 다 누렸고, 죽어서도 사치의 극을 달렸다. 죽은 그녀는 백 걸음 밖까지 선명한 빛을 뿜는 '야명주'를 입에 물고, 머리 위쪽에는 비취색 연잎 보석을 놓았다. 발 아래는 옥으로 만든 분홍 연꽃을 놓고, 몸에는 금사에 채색 구슬을 꿰어 화려하게 수놓은 마고자를 둘렀다. 머리에는 진주로 엮은 봉관을 쓰고 팔에는 국화 한 송이와 매화 여섯 송이를 다이아몬드로 상감한 팔찌를 찼다.

진시황릉은 아직 발굴되지 않은 상태라 그 속에 어떤 보물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는 '진시황은 즉위하자마자 여산에 땅을 파고 무덤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천하에서 70여만 부역자를 보내 3층의 지하수를 뚫고, 아래에 구리를 녹여 깔아 그 위에 관곽을 두었다. 궁관(황제가 쉬던 궁실)에는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을 가득 채웠다. 기술자에게 궁노와 화살을 만들게 해 땅을 파고 들어오는 자를 즉시 쏠 수 있도록 했다'고 쓰고 있다.

황제들만 무덤을 화려하게 조성한 것은 아니다. 서한 중기의 학자 양왕손은 백성들의 화려한 무덤 조성을 탄식했다. 동한 때는 정부가 나서 '거창한 무덤을 만들지 말라'는 금령을 만들기도 했다.

'지금 백성의 장례를 보면 사치스럽기 그지없다. 산 자는 쌀 한 톨 없다면서 묘를 짓느라 재산을 탕진하고, 삼복과 납일에 쓸 술도 없다면서 소를 잡아다가 제사에 바친다. 누대에 걸쳐 쌓아온 가산을 하루아침에 써버리니, 이것을 어찌 효도라 하겠는가? 관리는 금령을 마련하여 전국에 알리도록 하라.'

그러나 화려한 장례와 거창한 무덤의 폐해는 사라지지 않았다.

높은 봉분과 화려한 묘궁, 휘황찬란한 보물은 필연적으로 도적을 불렀다. 죽음을 앞둔 제왕들이 고심 끝에 미래의 '극락세계'를 완성했을 때, 다른 쪽에서는 극락세계를 파괴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도굴의 창궐로 죽은 자의 시체가 들판에 가득했고, 곧 죽을 자들은 극락세계를 만들어 놓고도 불안에 떨었다. 오늘 죽어서 묻힌 자가 내일 파헤쳐져 들판에 버려졌다. 위나라 문제 조비(曺丕)는 이렇게 말했다.

"예부터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고 파헤쳐지지 않은 무덤이 없다."

사서에 기록된 중국 최초의 도굴 사건은 2천700여년 전 서주 말기에 발생했다. 도굴 대상은 3천600년 전에 조성된 상나라 개국 황제 상탕의 무덤이었다. 탕왕의 무덤은 이후에도 수 차례 도굴됐고 결국 묘실은 텅 비었다.

소규모 도둑들만 도굴에 나섰던 것은 아니다. 북송이 망한 후, 금나라가 세운 괴뢰 황제 유예의 군대는 송의 황릉을 무자비하게 도굴됐다. 송 태조 조공윤의 능묘는 금대 말년에 다시 도굴돼 옥대와 수많은 보기(寶器)를 잃었다. 금이 망하자 이번에는 몽고족의 말굽이 공현의 송릉을 짓밟아 폐허로 만들었다. 남송 6릉은 북송보다 더 비참한 운명으로 끝장났다. 명 13릉과 청대의 동'서릉 역시 불타거나 도굴됐다. 청나라 동릉은 순치제의 묘를 제외한 모든 묘가 비적들에게 빠짐없이 도굴됐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명당에 묻히려고 다른 사람의 무덤을 싹 밀어버리기도 했다. 송나라 철종은 살아서 황제였으나 죽어서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체는 들판에 버려졌다. 그의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탐욕과 잔인함을 넘어 인간 존재의 슬픔에 이른다.

죽음을 눈앞에 둔 왕들은 도굴의 두려움에 떨었다.

조조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박장'을 제안했다 그는 자신이 죽으면 후하게 장사지내지 말고 척박한 땅에 묻으라고 했다. 무덤 위에 흙을 올리거나 나무를 심을 필요도 없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옷도 입던 대로 입히라고 했고, 보물이나 부장품을 넣지 말라고 했다. 이는 조조가 평생 숭상해왔던 '절검 정신'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도굴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조조 자신은 '모금교위'라는 관직을 두고 고대 황제의 능묘를 전문적으로 발굴(도굴), 자신의 군대를 먹여 살린 경험이 있다. 당 태종 이세민은 '박장하라'는 말을 퍼뜨리고, 실제로는 화려하게 묻혔다.

몽골(원나라)의 황제들은 장지를 철저하게 숨겼다. 칸(황제)들의 영구를 호송했던 군대는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무덤 자리까지 가는 동안 만나는 모든 것을 죽였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가리지 않았다. 칸들의 무덤엔 봉분을 올리지 않고 나무를 심지도 않았다. 영구를 땅속 깊이 묻은 후 1만 마리의 말들이 평평하게 땅을 다졌다. 후세는 이것을 '비장'이라고 부른다. 풀과 나무가 자랐고 누구도 무덤을 찾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도굴꾼들이 원대 황제와 귀족의 무덤을 팠다는 소식은 없다.

이 책은 중국 역사의 도굴을 집대성한 책이다. 황제들의 무덤과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 무덤의 양식, 함께 묻힌 부장품과 보물, 중국내 다양한 도굴꾼 부류와 도굴 현황 등을 총망라하고 있다. 거기에 도굴과 관련한 잡다한 지식, 민간에 전해지는 도굴 기술과 도굴에 쓰이는 도구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도굴꾼이 발명해서 지금은 중국 고고학계의 상징이 된 낙양삽(반원통형의 삽-중국 13개 왕조의 수도였던 낙양에서 처음 만들어지고 사용됐기 때문에 유래한 이름) 이야기는 흥미롭다. 이 삽은 한 번 땅에 꽂을 때마다 서너 자씩 푹푹 들어갔고, 들어올리면 땅속의 흙이 반원의 삽 안쪽에 박혀 그대로 올라왔다. 책은 또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황제와 귀족들이 강구했던 방법도 종류별로 소개하고 있다.

죽은 자(황제)는 지상의 화려한 삶을 영위하고자 지상의 삶을 어두운 지하로 가져갔고, 살아 있는 자(도굴꾼)는 땅 속의 삶을 지상으로 끌어올리려 했다. 죽은 자는 살아있는 자의 삶을 가져갔고, 살아있는 자는 죽은 자의 삶을 빼앗았다. 391쪽, 1만 4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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