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12년 전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두어 번 만났다. 당시 기자는 정치부에 있었고 노 전 대통령은 재기를 노리는 백면서생 신분이었다. 한번은 대여섯 시간을 같이 있었는데 그때 노 전 대통령이 했던 말, 손짓 하나하나까지 뚜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만남 자체가 그만큼 인상적이었다. 기자는 격동의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라 기백 있는 정치인에 대한 기대가 그 누구보다 컸기 때문일 것이다.
대구 뉴영남호텔 커피숍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런저런 얘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저녁 무렵이 됐다. 그래서 이강철 전 청와대특보가 운영하던 인근 횟집으로 자리를 옮겨 소주를 마셨다. 노 전 대통령은 소주 몇 잔을 마시고는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면서 술자리를 즐겁게 이끌었다. 꾸밈없는 말투와 소신 있는 태도는 함께 자리한 사람들에게 뭔지 모를 따뜻함을 줬다.
한창 흥이 고조되고 있는데 옆에 조용히 앉아있던 이강철 씨가 불쑥 끼어들었다. "노(전) 의원이 대권 도전을 하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좌중은 깜짝 놀라 일제히 노 전 대통령을 돌아봤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부산시장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연거푸 낙선하고 무척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기자는 입 밖으론 꺼내지 못했지만 얼핏 '말도 안 된다'라는 생각이 맨 먼저 났고, 곧바로 '이런 품성을 가진 분이 대통령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좌중의 눈길에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수줍은 듯한 웃음을 머금고 있던 노 전 대통령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후 2002년 대통령 후보가 되고 힘겹게 대통령에 당선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 술자리가 늘 머리에 맴돌았다. 그러면서 기자만의 삐딱한 생각에 '청와대에서도 그 특유의 서민적인 풍모를 유지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가졌다. 재임 중 기존 세력과 일부 언론의 모진 공격에 고통을 받았고 정책적 혼선도 있었지만, 서민대통령으로서의 이미지만큼은 결코 잃지 않았다. 본래 그런 분이었다. 퇴임 후에는 봉하마을로 낙향하는 아름다운 모습까지 보여줬다. 서울 중심의 사고로 돌아가는 세상에 그만큼 신선한 것은 잘 보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후 이광재 의원이 감옥에서 쓴 글이 있다. "나라를 사랑하는 남자, 일을 미치도록 좋아하는 남자, 자존심은 한없이 강하지만 너무 솔직하고 여리고 눈물 많은 고독한 남자." 노 전 대통령을 20여 년간 옆에서 지켜본 이 의원의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그만큼 매력이 있는 분이었다.
며칠 전 노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니 참 허망했다. 그날 털레털레 걸어 집에 들어가니 마침 수학문제를 풀던 중학생 딸아이가 잘 안 된다며 "죽고 싶어"라고 외칠 때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검찰 수사가 아무리 잘못됐더라도, 스포츠 중계하듯 잘못을 폭로하고, 가족과 친지를 전방위로 압박하더라도 굳건하게 버터내야 하지 않았을까. 정치적인 문제로 풀어도 될 것을 법률적 잣대로 들이대려는 뻔한 술수도, 인간적인 모멸감을 주는 악의적인 보도도 끝까지 참아내야 하지 않았을까. 지지자들마저 등 돌리고 고립무원의 상황이 됐더라도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지 않았을까. 넘어지고 깨지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남들이 불가능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때에도 대권 도전에 나서던 그 기백은 어디로 갔는가.
그게 아이들에게 극도로 힘들고 괴로울 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가르쳐야 하는 아버지로서 노 전 대통령을 마냥 편안하게 보내 드릴 수만은 없는 이유다. 누구도 스스로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가시는 길을 고이 보내 드리지 못하는 것은 기자로서의 삐딱한 시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쉬움이 많기에 그리움도 크다고 했던가. 고개 숙여 고인의 명복을 빈다.
박병선 사회1부장 la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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