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줄로 읽는 한권]

우리 마음 속의 왕을 죽여야 민주공화국이 산다. 대통령을 왕으로 생각하는 견해는 우리의 문화 유전자 안에 남은 침팬지의 그림자일 뿐이다. 대통령은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아니며 또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런데 헌법적, 법률적 제약 조건을 받아들이고 5년 계약직답게 행동하는 대통령은 대통령을 왕처럼 생각하는 백성의 요구를 충족할 수 없어서 인기를 잃는다. 사실은 계약직 공무원이면서 마치 왕처럼 행동하는 대통령은 권력 오남용을 거부하는 시민의 저항과 비판에 부닥쳐 인기를 잃는다.-『후불제 민주주의』 유시민 지음/ 돌베개/ 379쪽/ 1만4천원

유시민은 자신의 저서에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나는 것이 아니라 4000만개의 날개로 난다'고 이야기한다. 굵직굵직한 당파적 견해를 투박하게 나누어 봐도 적어도 대한민국은 예닐곱 개의 날개로 난다. 거기에다 지역주의 정서와 실질적 이권이 개입되고 나면 그 예닐곱 개의 날개조차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째지고 뭉쳐지고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은 어떤 의미에서 정말 '못해먹을 직업'이다. 영화감독이나 CEO나 노조위원장이나 축구대표팀 감독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들은 적어도 재임기간 동안은 '독재'를 할 수 있으며 피아가 비교적 확실하고 내야 할 결과가 단순하다. 그러나 대통령은 막연하고 두루뭉술한 수많은 기대에 부응해야 하며, 어떠한 시도를 하든 '찍어준 사람들'의 논리적인 비판에 직면하며 어떠한 결과를 내든 '원래 미워했던 사람들'의 악의적인 비난에 시달린다. '박정희'를 닮으면 닮았다고 욕먹고 '박정희'를 닮지 않았으면 닮지 않았다고 욕먹는 것이 우리나라 대통령들이 처한 현실인 것이다.

비보를 접한 후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니 한 네티즌이 이런 요지의 글을 올려둔 것을 보게 됐다. 예전에 미국의 어떤 장군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유일한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이다.' 그 네티즌은 울먹이며 잇는다. '우리 사회가 좋아하는 유일한 노무현은 죽은 노무현인 것 같아요.'

평범한 우리는 관대하다. 자신의 잘못된 행위나 실언에 특히 그렇고 주위의 친한 사람들에 대한 평가에서도 그렇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과'에 대해 우리보다 훨씬 엄격했던 한 정치인에게는 그분의 재임 중에도 퇴임 후에도 단 한번 관대해본 적이 없다. 우리 사회의 어떤 날개도 그분의 분명한 '공'을 큰소리로 치켜세워 준 적이 없고, 다른 여느 정치인들과 달리 그분에게는 '지역'이라는 이름의 튼튼한 벙커도 있어 준 적이 없다. 그분이 그렇게 외롭게 떠난 뒤에야 관대해지는 우리 모습을 지켜보며 정말 비통하고 참담한 심정이 아닐 수 없다. 유시민의 날카로운 지적이 나 같은 비겁하고 문약한 소시민의 폐부를 관통한다.

책임 의식이 빈약한 사람일수록 좋은 지도자를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행동은 하지 않으면서 지도자에 대한 불평을 심하게 늘어놓는 경향이 있다. 다수 국민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민주주의 그 자체가 위험에 빠지게 된다.- 『후불제 민주주의』 상동

박지형(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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