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일요일, 나의 시간들조차 방황한다. 나의 가장 소중한 그림자들. 흰 작은 꽃도 너를 깨우지는 못하리라. 슬픔의 검은 조각들도 결코 너를 앗아가지 못하리라… .'
노래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의 가사다. '곧 슬프게 타는 양초들과 기도하는 이들이 있으리라. 아무도 슬퍼하지 않기를, 나는 기쁘게 떠나갈 테니….' 하루 종일 그림자들과 싸운 우울한 일요일이었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는 일요일이었다. 참으로 슬픈 날이었다.
필자의 아이팟 음악 목록에서 '글루미 선데이'를 검색하니 모두 20곡이 나온다. 빌리 할리데이, 비요크, 밥 알렌, 엘비스 코스텔로, 헤더 노바, 사라 브라이트만, 사라 맥라클랜, 시니어드 오코너…. 웬만한 뮤지션들이 대부분 이 곡을 불렀다.
가사에서 그렇듯 '글루미 선데이'의 정서는 이별이다. 천사들조차 되돌려 놓을 수 없는 바로 그 이별이다. 그래서 한때 '희대의 자살 교향곡'이라 불렸고, 1935년 헝가리에서 레코드로 발매된 지 8주 만에 187명이 이 곡을 듣고 자살했다고 알려져 있다. 1936년 4월 30일, 프랑스 파리의 레이 벤츄라 오케스트라 콘서트 홀에서 '글루미 선데이'를 연주했던 단원들이 드럼 연주자의 권총 자살을 시작으로 모두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는데 믿기 어려운,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작곡자인 레조 세레스는 연인을 잃은 아픔으로 이 곡을 작곡했는데, 1968년 겨울 고층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했다.
그러나 노래를 유심히 들어도 그런 충동은 일어나지 않는다. 1930년대, 두 차례 세계 대전의 틈바구니에서 고통받던 시대적 아픔이 공명되지 않기 때문일까. 더 이상 이 곡을 '자살 교향곡'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아름다운 사랑과 이별의 회한만 묻어날 뿐이다.
이 곡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글루미 선데이'의 정서 또한 이렇다. 2000년 개봉돼 화제를 뿌린 '글루미 선데이'는 핏빛처럼 붉은 배경에 고혹스러운 여주인공이 눈을 내리깔고 슬픔을 참고 있는 포스터가 두고두고 기억나는 영화였다.
1999년 어느 가을. 독일의 한 사업가가 헝가리의 작은 레스토랑을 찾는다. 젊은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레스토랑 안을 둘러본다. 그리고 예전에 그가 좋아했던 음식을 먹으며 연주자에게 "그 곡을 연주해 주게"라고 부탁한다. 음악이 흐르는 순간, 피아노 위에 놓인 젊은 여인의 사진을 발견하고 놀란다. 그 순간 가슴을 쥐어뜯으며 쓰러진다.
도대체 60년 전 이곳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사진 속의 일로나(에리카 마로잔)는 모두가 사랑하는 여인이다. 모두 그녀가 가져온 음식을 먹고싶어 하고, 접시를 내려놓는 순간 가슴에서 전해지는 그녀의 향취를 느끼고자 한다. 가장 행복한 사나이가 레스토랑 주인 자보(조아킴 크롤)이다. 그는 일로나와 연인 관계다.
피아노를 새로 들이면서 연주자를 물색하던 중 남루하지만 강렬한 눈빛의 안드라스(스테파노 디오니시)가 찾아온다. 그는 아름답지만 슬픈 곡을 연주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어떤 이는 "마치 듣고 싶지 않은 어떤 얘기를 하는 것 같다"고 한다. 매일 레스토랑에 들러 일로나를 스케치하던 중년 남자는 이 곡을 듣고 혼이 나간다. 그리고 "너무나 아름다운 곡입니다. 고마워요. 이제 가 봐야겠군요"라는 쪽지를 남기고 사라진다. 이튿날 그가 시체로 발견되면서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글루미 선데이'가 음반으로 빅히트하면서 이 곡을 듣고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한다.
사랑의 무게를 저울로 잴 수야 있을까. 그래도 가장 큰 사랑은 '죽도록 한 사랑'이다. 그래서 죽음으로 사랑을 증거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자칫 저주로 흐를 수 있다. '글루미 선데이'의 저주처럼 말이다.
이 영화가 개봉됐을 때 영화 배급사는 '글루미 선데이'란 곡을 먼저 홍보했다. 당시 이 곡을 아는 이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헤더 노바의 경쾌한 '글루미 선데이'와 매력적인 목청의 엘비스 코스텔로의 노래를 음악CD로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이 곡의 배경이 홍보 대상이었지만, 결국 한국 관객이 선택한 것은 사랑의 색다른(?) 형태였다.
일로나와의 삼각 관계를 예상한 것일까. 자보는 안드라스와 첫 대면에서 이미 묘한 불안감에 휩싸인다. 아니나 다를까, 일로나는 안드라스의 묘한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레스토랑의 문을 닫고 나서는 세 사람. 일로나는 망설인다. 안드라스가 사라진 골목을 연방 쳐다본다. 그녀의 속내를 알아챈 자보는 "당신이 선택해"라고 말하며 다른 골목으로 걸어간다. 보통 때는 그녀와 같이 가던 길이다.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뒤돌아본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일로나는 안드라스에게 간 것이다.
이때 '글루미 선데이'의 곡이 흐른다. 다른 남자의 뒤를 따라간 연인의 그림자를 보는 남자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질까. 다음날, 안드라스와 함께 밤을 보낸 일로나에게 자보는 말한다. "전부 잃느니, 한 부분이라도 가지겠어." 셋이 동의한 삼각관계, 번갈아 가며 밤을 보내야 하는 셋의 기이한 사랑이 한국 여성 관객의 부러움을 샀다. 일로나 역의 에리카 마로잔은 신비로우면서 육감적인 매력을 뿜어 남성 관객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사랑하는 이를 두고 떠나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남은 자의 죄스러움을 어쩌라고, 지켜주지 못한 한을 어쩌라고.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외로운 꿈이었다. 나는 우리가 서로 떨어졌을 때 심장이 녹아 흐름을 느꼈다. 사라지고, 사라지고, 사라지고….'
김중기 객원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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