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이 40m, 높이 18m로 떨어지는 물만 봐도 속이 다 시원해지죠. 거북 등껍질같은 바위들이 여러 개 모여있는 장관은 세계 어디를 가도 찾아볼 수 없어요. 그런데 여기에 관련된 재미있는 전설이 있어요."
노인 일자리 만들기 프로그램으로 문화해설사로 나선 게 아닌, 자원봉사로 이곳의 해설을 맡았다는 일본의 70대 노파 이야기는 끊어질 줄 몰랐다.
"옛날에 이곳을 통치하던 번주가 아름다운 풍경을 그냥 둘 수 없어 술을 한 잔 하게 됐어요. 그런데 동네에 아주 아리따운 아가씨가 살고 있었거든. '오유키'라는 이름의 아가씨였는데 번주가 이런 아가씨를 그냥 놔둘 리가 있나. 자신의 술을 따르게 한거야. 아뿔사, 그러다 오유키가 그만 술을 잔 밖으로 따랐던거에요.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게 무슨 큰 죄가 됐는지는 몰라도 그 길로 오유키가 바로 폭포에 몸을 던졌대요. 그 후로 오유키의 행방을 찾으러 남자친구가 계속 이름을 불렀지. 그랬더니 술잔이 폭포를 거슬러 올라오더라는거야."
이 지역 출신으로 자신이 아는 것들을 관광객들에게 들려주려는 그의 열성에 귀를 열어둘 수밖에 없었다. 일본 폭포 100선 중 하나인 세키노오(關之尾湯) 공원에 담긴, 조금은 우스운 전설이었다. 하지만 노파의 기발한 창작물일지라도 왠지 관광객의 귀와 눈을 사로잡아 관광지에 의미를 부여하게 만들었다. 절경만 감상하고 돌아가기엔 아쉬움이 조금 남지만 이야기 한 토막이 더해지자 이야기와 풍경이 한 데 어우러진 것.
세키노오 공원이 있는 곳은 기리시마야쿠시마 국립공원. 1km를 채 가지 않아 전설과 이야기가 띄엄띄엄 매몰돼 있는 곳이다.
폭포와 그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도 흔한 이야기. 다만 휴화산과 활화산의 흔적은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언제 폭발할지 몰라 사람들의 손을 덜 탄,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의 산들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일본 규슈 남단 가고시마현과 미야자키현의 경계에 있는 '기리시마야쿠시마 국립공원'. 이 곳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기리시마연산(5개 봉우리로 연이은 산)을 찾아갔다.
◆기리시마야쿠시마(霧島屋久) 국립공원
기리시마야쿠시마 국립공원은 '세토나이카이'(일본 혼슈 서부와 시코쿠, 규슈의 10개 현에 걸쳐 있는 바다를 중심으로 한 국립공원)와 '운젠아마쿠사'(일본 규슈 중서부, 나가사키·구마모토·가고시마의 3개 현에 걸쳐 있는 국립공원)와 함께 1934년 일본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이곳의 상징은 기리시마 연산. 가라쿠니다케(韓國岳·해발고도 1천700m)를 시작으로 시시고다케(獅子戶岳·1천428m), 신모에다케(新燃岳·1천421m), 나카다케(中岳·1천345m)를 거쳐 다카치호미네(高千穗峰·1천574m)로까지 이어지는 기리시마 연산은 멀리서 봐도 한 눈에 다섯 개의 높은 봉우리가 두드러진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이곳의 최고 명승지는 해발고도 1천700m의 가라쿠니다케. 한자로는 한국악. 일본어로도 '가라(가야)/쿠니(국)/다케(산)'라고 풀이되고 있어 우리나라와 깊은 연관이 있는 산으로 보인다. 실제 이곳이 '한국악'으로 불리게 된 연유는 두 가지 설로 압축됐다. 하나는 앞서 풀이한 것처럼 가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유민들이 이 산에 올라 고향을 바라보며 그리워했던 곳이라는 설이 있다. 다른 하나는 맑은 날 이곳에서 한국땅까지 볼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그것. 직경 900m, 수심 280여m의 분화구가 있어 장관을 연출한다. 또 정상에서는 둘레 1.9km, 수심 11m의 화구호인 오나미이케(大浪池)를 볼 수 있다. 확실한 것은 흐린 날에도 40여km 떨어진, 활화산 사쿠라지마(櫻島)가 조금씩 뿜어내는 하얀 연기를 확실히 볼 수 있었다.
◆기리시마 연산(連山)
13.7km의 산길을 걷는 것은 다소 힘든 여정일 수 있지만 설악산 높이의 산들 사이를 오르내리며 가고시마와 미야자키 전역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첫 시작을 가라쿠니다케에서 시작, 시시고다케로 내려오면서 다양한 형태의 분화구를 볼 수 있어 화산박물관에 온 것이나 다름없다. 특히 화산폭발로 지난해까지 입산이 금지됐던 신모에다케를 향하는 길에는 삶은 계란 냄새가 시종일관 코끝을 찌른다. 유황향은 물론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라 당장이라도 또 용암을 토해낼 것 같은 산이기에 더 매력적이다. 특히 산철쭉 군락지로 잘 알려져 있어 얼핏 비슬산 참꽃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나카다케로 넘어가는 길에는 5월 중순부터 활개를 치기 시작한 철쭉이 온천지에 진동한다. 6월 말까지 한창이라 상춘객들의 발걸음을 해발 1천345m고지까지 끌어올린다.
무엇보다 오하치분화구의 압권은 용암흔. 용암이 흘러내린 자국이 산중턱까지 이어져 산에 흉터가 생긴 것처럼 보인다. 녹색의 숲과 붉은색 용암흔이 어우러져 독특한 장관을 연출한다. 붉은색을 띄는 것은 마그마 속 철 성분이 그대로 산에 박혔기 때문.
연산의 종착역은 다카치호미네. 화산박물관 관람에 8시간씩이나 걸린다는 것은 분명 시간 낭비다. 하지만 박물관 내부가 아닌 산을 직접 걸으며 느끼는 데 8시간은 아깝지 않은 시간이다.
◆가라쿠니다케에서 나카다케까지
'세상에 이런 곳이….'
기리시마 연산에는 졸졸 흐르는 계곡 물소리, 지저귀는 산새소리, 곳곳에서 뿜어져나오는 약수터는 전혀 없다. 한국 산에 익숙한 이들이 기리시마 연산을 오르며 황량하다고 여길 정도다. 하지만 이곳이 화산폭발로 형성된 곳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다지 이상할 것은 아니다.
▷가라쿠니다케로 가는 길
먼저 가라쿠니다케로 오르는 길부터가 한국의 산과 다르다. 한국의 산들은 여러 갈래의 길이 있어 등산 시작점이 천차만별. 하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다. 대체로 정해진 3, 4곳에서 시작해 그마저도 한 가지 길로만 사람들이 오른다. 이는 일본의 등산 인구가 한국에 비해 적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르는 시작은 한국의 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비슬산 참꽃축제 때 흐드러지게 핀 참꽃을 연상시킬 정도로 산 곳곳에 분홍색 꽃이 피어 있었다. 하지만 점점 오르자 화산의 특성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가라쿠니다케는 처음부터 끝까지 화산암으로 이뤄진 산이었다. 화산암이다보니 크기에 비해 무게가 가벼워 등산객이 발을 딛고 오르는 데 힘이 들었다. 돌멩이나 돌을 밟고 디뎌 올라서야하지만 돌들이 아래로 우르르 굴러버리거나 심지어 깨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발고도가 높아질수록 한 눈에 들어오는 분화구와 칼데라호는 백록담이 아니면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 정상에 오르면 가장 먼저 300m 높이의 낭떠러지가 눈 앞에 나타나 등산객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이곳은 낭떠러지가 아닌 분화구의 일부. 봉우리에서 분화구 바닥까지 300m에 이르러 낙사사고의 위험도 있지만 일본 정부에서는 따로 안전펜스를 치거나 하지 않았다. 규슈관광추진기구 관계자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리기 위함"이라며 "아직 낙사사고는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등산객들이 알아서 조심한다는 얘기였다. 실제 심한 바람이 불어 알아서 조심할 수밖에 없어 보였다.
▷시시고다케를 넘어 신모에다케, 그리고 꽃천지 나카다케까지
가라쿠니다케에서 시시고다케로 넘어가는 길은 내리막 급경사. 규슈 지방정부에서도 그래서인지 내리막 길에는 등산객들이 화산암에 쉽게 구르지 않도록 계단을 만들어뒀다. 이 덕분인지 인근에는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꽃과 나무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신모에다케에서 보면 사자모양의 바위가 두드러진다 해서 붙여진 이름의 시시고다케까지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길이었다. 이 때문에 아침부터 기리시마 연산 종주에 나선 등산객들이 점심을 먹는 장소이기도 했다. 오랜 역사를 통한 체득인지 까마귀 수십마리가 까악거리며 점심을 먹는 등산객들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시시고다케의 사자바위가 선명하게 보일 때쯤이면 삶은 달걀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바로 유황향이다. 여전히 활동 중이면서 지난해 9월 폭발하기도 했던 신모에다케 분화구에서 풍기는 것이었다. 정상에 올라 분화구를 내려다보니 분화구 곳곳에서 하얀 연기가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지난해 11월 재개장한 직후에는 에머랄드 빛깔이었던 물이 현재는 누런빛을 띄고 있었다.
나카다케까지 가는 길은 철쭉의 향연. 나무계단을 다닥다닥 붙여놓아 하산길도 편했다. 굳이 이렇게 하지 않더라도 일본 등산객들은 이미 정해진 길로만 다녔다. 등산로가 마치 머리카락에 가르마를 탄 것처럼 허옇게 보일 정도. 이런 데는 일본의 등산 인구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도 한몫한다. 일본인들은 산을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신봉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글·사진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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