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매번 영화가 개봉될 때마다 첫 날, 첫 시간에 본다. 대개 목요일 오전 10~11시 사이. 매주 가장 화제가 되는 개봉작을 고르지만, 평일인데다 비교적 이른 시간이다 보니 함께 보는 관객은 많아야 20~30명 정도다. '박쥐', '터미네이터;미래전쟁의 시작'은 그나마 관객이 100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28일 개봉한 '마더'는 좋은 작품을 기다리는 관객의 갈증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오전 10시 한일극장에서 첫 상영. 앞자리 일부를 제외하고 관객이 꽉 들어찰 만큼 북적였다. 이들은 '마더'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가족이라는 식상한 주제와 감독 봉준호의 힘
엄마, 아버지, 가족은 식상한 주제다. 가족 간의 갈등, 외부에서 닥쳐온 위기, 이를 통한 가족의 재발견. 대충 이 정도 공식이면 가족 영화의 스토리 전개는 거의 다 풀 수 있다. 영화 '마더'도 마찬가지다. 남편도 없이 하나뿐인 아들과 함께 사는 엄마. 아들은 다소 모자란 탓에 동네에서 벌어지는 자질구레한 사건·사고에 심심찮게 휘말린다. 엄마는 세상이 뭐라 하건 아들이 최고다. 심지어 노상 방뇨하는 아들을 뒤따라가 소변을 보는 중에 보약 사발을 입에 들이밀 만큼 아들 사랑은 절대적이다. 벌레 하나 못 죽이는 순진한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살인자로 경찰에 붙잡혀간다. 눈이 뒤집힐 일이다. 경찰도 못 믿겠고, 돈만 밝히는 변호사는 패버리고 싶을 정도다. 그래서 직접 나선다. 이쯤 되면 영화는 뻔한 공식을 따라가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끝났다면 영화 '마더'가 아니고, 봉준호가 아니다.
2003년 '살인의 추억', 2006년 '괴물'의 각본과 감독을 맡았던 봉준호. 이번 영화 '마더'에서도 묵직한 존재감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마치 '똑같은 스토리라도 어떤 감독이 만드느냐에 따라 천지 차이'라고 무언의 항변을 하는 듯하다. 그만큼 '마더'는 봉준호식 스타일을 충실하게 따랐고, 관객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했다. 감독은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과 함께 '놀이'를 한다. 스크린을 마주한 관객의 머리 속을 훤히 꿰뚫고 있는 듯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주도권을 놓지 않고 관객을 몰아붙이다. 그래서 때로는 힘들다.
2시간이 조금 넘는 러닝타임에서 전반부에 해당하는 1시간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도대체 뭘 보여주려는 건지 잔뜩 기다리게 만든다. 지칠 만큼 기다리게 한 뒤 나머지 1시간 동안 정신이 멍하도록 몰아친다. 영화의 첫 장면, 엄마 혜자(배우 김혜자와 같은 이름이다)는 사방에 펼쳐진 억새밭 한가운데에서 뜬금없이 춤을 춘다. 관객은 웃는다. 그러다가 지켜보다. 저게 무슨 상황이지 하며 궁금해 한다. 장면은 바뀌고, 혜자는 한약방에서 작두로 약재를 썬다. 눈길은 길 건너 아들에게 머문다. 약재를 쥔 손은 점점 작두로 향해간다. 손이 잘릴지도 모르는 상황이 다가오지만 그저 모자란 아들이 걱정스러워 눈길을 뗄 수 없는 엄마. 이렇게 '마더'는 시작한다.
◆배우 김혜자의 발견과 훌륭한 스토리텔링
배우 김혜자의 새로운 발견이다. 봉준호는 진작부터 김혜자를 염두에 두고 영화를 구상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김혜자는 배우로서 자신의 한계를 느낄 만큼 힘들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마더'는 두 사람의 노력이 허사가 아님을 입증했다. 초반부에 관객은 엄마 혜자에게 몰입하기 힘들다. 아들 도준(원빈)의 친구인 진태(진구)가 "너희 엄마는 이런 네가 뭐가 그렇게 좋다는 건지"라고 말할 정도다. '바보'라고 놀림받는 아들이 왜 그토록 엄마에게 소중한 존재인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관객은 설정된 모정이 아닌 진짜 엄마를 만나게 된다. 이것 역시 감독의 고도의 전략이며, 배우 김혜자의 힘이다. 아들이 다섯 살 때, 너무 살기 힘들었던 엄마는 농약을 마시고 동반자살을 기도한다. 하지만 마음이 약했다. 덜 치명적인 농약을 마신 때문에 아들은 며칠 동안 구토와 설사만 했을 뿐 목숨을 건졌다. 천연덕스레 다섯 살 때 일을 기억해 내며 엄마에게 '왜 그때 날 죽이려고 했느냐'고 묻는 아들에게 엄마는 소스라치는 비명으로 답을 대신한다. 그렇게 살아남은 엄마와 아들이 왜 각별하지 않겠는가. 그런 아들을 어떻게 살인자로 내버려 둘 것인가.
영화는 많은 것을 담았지만 부담스럽지 않게 녹여냈다. 큰 줄기는 살인자로 몰린 아들 도준과 이를 풀어주려는 엄마 혜자의 이야기다. 하지만 봉준호는 '이야기꾼'다운 면모를 남김없이 보여줬다. 사건 해결에 눈이 먼 형사 제문(윤제문)은 턱도 아닌 증거 하나로 아들 도준을 살인범으로 체포한다. 제문은 혜자를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였는데도 모른 체하고. 어렵사리 구한 변호사는 어떤가. 변호할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 돈 뜯어낼 궁리만 한다. 룸살롱에서 아가씨들을 끼고 술을 마시다가 혜자를 불러내서 아들을 정신병원에 보내자고 제안한다. 그 옆에는 사법연수원 동기생인 검사가 술에 취해 정신을 잃고 앉아있다. 도준의 친구 진태는 영화 속에서 가장 비중 있는 조연이다. "아무도 믿지마, 나도 믿지마. 다 필요없고, 엄마가 직접 찾아". 특수부대 출신인 진태가 본드를 마시던 불량 고등학생들을 두들겨패는 장면은 등골이 서늘할 정도다. 사건 해결의 열쇠는 이들 고등학생에게서 시작된다. 그리고 사건의 피해자인 여고생 아정(문희라). 어느 날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채 온 마을에서 다 보이도록 폐가 2층 난간에 내걸린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단 둘이 사는 아정의 억울한 죽음 뒤에 과연 어떤 비밀이 숨어있는 것일까? 아정을 죽음으로 내몬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영화는 모성애를 다루고 있지만 과연 진실과 정의는 무엇인지 묻기도 한다. 참고로 전작 '살인의 추억'에서 진범을 끝까지 드러내지 않았던 봉준호는 '마더'에서는 결론을 다 보여준다. 그리고 밝혀진 결론이 더 섬뜩할 수 있음을 각인시킨다. '마더'는 불편한 영화다. 웃음과 쾌감이 영화 표면을 수시로 장식하지만 전하려는 메시지는 자못 묵직하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뒤 몇 시간이 지나서 잘근잘근 되씹어보고 나면 새삼 봉준호의 힘을 느끼게 된다. 봉준호는 자신의 이야기 속에 배우들을 녹여내는 힘을 지녔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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