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전, 열살짜리 소년 A와 B는 안젤라 밀턴이라는 역시 열살짜리 소녀를 살해했다. 두 소년은 백주에 소녀를 미행해 붙잡은 다음 강가에서 성폭행하고 살해했다. 검찰은 두 소년이, 혹은 둘 중 한 소년이 여자아이를 강간까지 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소년이 처음 법정에 출두했을 때 성난 군중은 소년이 탄 자동차 운전석 유리창을 깨트렸다. 그들은 질서 유지선을 무너뜨렸고, 이를 제지하던 경찰관들은 분노한 군중에 밀려 넘어졌다. 군중은 방벽을 넘어 자동차 측면을 마구 두들겼고, 소년을 끌어내라며 울부짖었다. 사람들은 저런 짐승들이 죄 한 점 없는 자신들과 한데 섞여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에 치를 떨었다. 더불어 죽기 전에는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소녀 안젤라 밀턴의 죽음을 애도했다. 죽은 소녀는 곧바로 '성자'가 됐다. 소녀는 선택받은 사람이었으며, 세상 속에 있었고, 이 세상 그 자체였다. 축복 받아 마땅했던 소녀는 이 세상의 연인이자 딸이며, 학생이었고, 미래의 교사였다. 그렇게 선하고 어여쁜 소녀가 악마 같은 두 소년에 의해 살해됐다. 사람들은 소년 A와 B의 파렴치한 행위와 무죄인 척하는 모습에 치를 떨었다. 무죄를 주장하는 소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당장이라도 유죄를 선고하고 찢어 죽이고 싶어했다.
14년 동안의 수형생활 끝에 소년 A는 가석방됐다. 소년은 이제 스물네살의 청년이 돼 있었다. 공범이었던 소년 B는 교도소에서 자살했다. 소년 A는 수형생활 중 자신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던 봉사자 테리의 도움으로 가석방됐고 직장과 집을 갖게 됐다. 소년 A는 테리가 선물해 준 나이키 에어 이스케이프 운동화를 신었고, 스스로 지은 '잭'이라는 이름을 갖고 세상 속으로 나왔다. '소년 'A'는 더 이상 세상에 없었다. 잭은 이제 새 삶을 살도록 돼 있었다.
잭은 자동차를 훔친 혐의로 교도소에서 단기 복역을 마치고 막 출소한 사람으로 돼 있었다. 삼촌 테리가 그에게 방을 얻어주고 집을 구해주었다. 잭은 신문마다 떠들어대고 있는 야단법석과는 무관한 사람이었다.
사회 적응기간 동안 잭은 테리와 함께 공원과 식당, 술집과 미술관, 공항을 찾아다니며 살아가는 법을 익혔다. 제 시간에 출근하는 법을 배우고, 온갖 인적사항을 기입하고 은행계좌를 개설했다.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서류의 빈칸을 하나씩 메울 때마다 소년 A는 사라지고 잭이란 이름의 남자가 현실이 되어 갔다. 이제 소년 A와 A가 저지른 범죄는 과거일 뿐이다. 소년 A는 잭이 되어 평범한 사회인으로 살아가며, 평범한 사회인으로 행복을 누린다.
친구도 사귀고, 직장과 집도 새로 얻었다. 사랑하는 여자도 생겼다. 이제 세상이 자신을 용서해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너무나 간절했던 것을 손에 쥘수록, 행복감이 커질수록 죄책감은 깊어진다. 결국 내가 사귀는 친구들, 애인, 직장과 집은 '내가 자동차 절도죄로 교도소에 잠깐 다녀온 사람임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내가 14년 전, 이 세상을 분노로 몰아넣은 장본인임을 모르지 않는가.
어느 날 잭은 교통사고 현장에서 여자아이를 구해준다. 이 사건으로 그의 영웅적 행동이 대서특필되고 그의 사진이 일간지 1면을 장식한다. 한편 잭이 출감한 날부터 소년 A의 행방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던 미디어들의 추적이 시작된다. 어떤 동네에서는 자경단(마을을 지키기 위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단체)의 공격으로 한 남자가 병원에 입원하고 그의 집이 불타기도 했다. 이 자경단은 이 남자가 '14년 전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사라진 소년 A'인 것으로 잘못 파악했다.
잭(과거의 소년 A)은 들키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고 싶다. 그러나 시민의 추적은 끊이지 않는다. 급기야 인터넷에 소년 A의 행방을 찾는 현상금이 붙는다. 미화 3만달러, 파운드로 2만유로였다. 잭을 돌봐주는 테리는 걱정말라고 말한다.
"그들은 네 사진도 없고 네가 있는 곳도 전혀 몰라. 항상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지. 아무리 그래봤자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거야. 그들에게 단서가 하나라도 있다면 현상금까지 내걸 필요가 있었겠어?"
그러나 결국 미디어와 시민 추적자들은 잭이라는 이름으로 숨은 '소년 A'를 찾아내고 몰려든다.
잭이 사는 집은 포위됐다. 흥분한 기자들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잭은 알약을 먹고 조용히 잠들기로 한다. 천국으로 향하는 길은 거기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문득 그는 마음을 달리 먹었다.
'싸워보지도 않고 죽을 수는 없다.'
그는 삼켰던 알약을 게워낸다. 노란 위액이 나올 때까지 게워낸다. 그리고 지붕에 붙은 채광창을 열고 집을 빠져나와 옆집의 지붕과 지붕을 뛰어넘어 도망친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멀리 기차의 종착역까지 달아나 바닷가에 다다른다. 부두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부표와 함께 묶여 있는 배를 보며 그는 물 속으로 뛰어든다. 배까지 헤엄쳐서 이 나라에서 도망칠 것이다. 물론 배가 있는 곳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배를 탈 수 있다고 해도 그 배가 가라앉지 않는다는 보장 역시 없다. 그는 자신을 용서해주지 않는 나라의 마지막 끝자락까지 달아난 다음 바다로 뛰어든 것이다. 그 순간은 추락도 아니고 비상도 아니었다.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이었다.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1993년 영국 리버풀의 한 쇼핑센터에서 두살짜리 남자아이가 실종됐다. 아이는 주검으로 발견됐다. 이 잔인한 살해사건의 범인은 열살밖에 안 된 소년들이었다. 이 사건은 영국 범죄 사상 가장 충격적이고 슬픈 사건으로 기록됐고, 영국을 CCTV 천국으로 만드는 계기가 됐다.
지은이 조나단 트리겔은 이 사건을 소재로 소년 범죄를 고발함과 동시에, 범죄자인 소년들의 심경을 따라 사건을 풀어감으로써, 독자들에게 속죄와 용서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 소설은 '기소된 두 소년이 의자에 앉았을 때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고 말함으로써 영국의 법 제도를 비판하는 측면도 있다. 대부분의 사회와 다르게, 영국에서는 10세밖에 안 된 두 소년을 성인으로 분류해 기소했다. 특히 공범이며 태생적으로 악당처럼 묘사됐던 소년 B를 교도소 내에서 자살한 것으로 설정하고, 상대적으로 착한 소년 A의 관점에서 소설을 풀어간다는 점, 또 가석방된 소년 A가 교통사고 현장에서 여자아이를 구한다는 설정은 속죄와 용서를 이야기하는 이 소설의 약점으로 읽힌다.) 380쪽, 1만1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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