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영원한 마음의 고향, 어머니!

나의 고향 집에는 세 식구가 오순도순 살고 계신다. 형님과 형수님이 엄마를 모시고 살고 계신다. 그 중에서 가장 어린 사람이 올해 77세, 나의 엄마 같은 형수님이시다. 내가 열 살 때 시집오셔서 어려운 가문을 일으키신 분이시다. 그런데도 여태 어른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도 가장 어리기 때문이시다.

대덕당 이씨 부인, 계유생(77), 주민등록상 '이금자'라는 이름이 있지만 불러주는 사람이 없다. '용호댁 며느리, 철이 엄마, 사모님, 희정이 할매…'가 이름을 대신한다. 그렇지만 불평 없이 평생을 살아 오셨다. 시동생, 시누이, 아들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 분가시켰다. 아버님, 어머님을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효도하셨다.

마을 사람들은 이런 형수님을 딸과 같다고 한다. 고부간에 있을 수 있는 갈등을 찾아 볼 수가 없다.

효를 몸으로 가르치시는 증인이요, 산 교과서 같으신 분이시다.

두 번째 어린 사람은 초등학교 교장 출신이신 형님, 78세의 노인이시다. 평생을 한결같이 부모님 모시고 고향을 지키고 계신다. 당신께서도 노인이신데 한결같이 엄마를 어린아이 살피듯이 보살피신다. 엄마 방, 이불 밑에 손을 넣으면서 "방 따뜻합니까?"라고 하신다.

우리 집에서 가장 웃어른은 나의 어머님이시다. 용인당 고씨, 경술생, 만 100세, 15년 전에 아버님 사별하시고 독수공방하는 분이시다. 155cm의 나지막한 키, 예쁘고 단정하고 사리판단 분명하신 여장부이시다. 지금도 찬물에 머리 감으시고 공깃밥 한 그릇을 뚝딱 드신다. 힘들지만 걸려오는 전화는 그런대로 받을 수 있다. TV 연속극과 뉴스를 보시면서 희로애락을 즐기신다. 천부적으로 건강하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침저녁으로 동네 한바퀴 돌아오신다. 간단한 빨래와 식사, 방 청소는 손수 하신다. "내가 30년만 젊어도 네 밥 해주러 갈 텐데…."라고 하신다. 직장 문제로 혼자 있는 막내인 내가 늘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서울 경복궁에 모시고 간 적이 있다.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양해를 구하고 먼저 모시고 들어갔다가 어머님께 혼이 났다. "네 어미 이마에 100살이라 써 다녀라." 사람들이 없는 조용한 곳에 이르러 꾸짖으셨다. 차례를 지키지 않은 데 대한 질책이었다.

휠체어를 빌렸더니 "너나 타라"하시며 거절하셨다. 허리 꼿꼿하시고 걸음걸이가 흐트러짐이 없다.

어머니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원리원칙주의자이시고 강백하시다. 형수님께는 엄청 부담스러울 때가 많았을 것 같다.

늦둥이로 태어난 나는 여섯 살에 6'25를 맞았다. 총알이 빗발치고 폭탄이 터지는 전쟁터는 무서웠다. 덥고, 배고프고 ,어두운 피난길에 엄마는 나를 꼭 업고 다니셨다. 친구들은 대부분 걸어 다녔다. 업히는 게 창피하여 걷겠다고 했지만 엄마는 허락하지 않으셨다. 열 살 때까지 나는 엄마 가슴을 더듬어야 잠이 왔다. 엄마는 나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시다.

옹기장수와 방물장수, 인삼장수는 우리 집을 거점으로 여러 날 묵어가곤 했다. 농촌 생활이 넉넉지 않았지만 숙식은 물론 무료였다. 한때는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반가댁 체면을 걸어두고 떡 장사를 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우리 삼남매를 끝까지 공부시켜 주셨다.

외로움도, 그리움도, 괴로움도, 줄기차게 이겨가는 어머니에게 할머니는 대담배를 권하셨다. 그리고 술도 가르치셨다. 할머니는 어머니의 또 다른 엄마이셨다. 그때만 해도 어른 앞에서 술, 담배는 금물이었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 했지만 막다른 골목에선 어머니도 수없이 문고리에 목을 매셨다. 술, 담배, 스트레스가 건강을 해친다지만 그건 넉넉할 때 얘기인 것 같다. 버려진 비탈 밭을 개간하여 산두벼를 심었고 외딴집 산막에서 고행도 하였다. 두 번의 담석증 수술과 백내장 수술도 받으셨다.

그러나 어머님이 무병장수하시어 자랑스럽다. 모시고 계신 형님과 형수님의 효성에 감사를 드린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효를 대물림하는 게 대견스럽다. 열 마디 잔소리보다 실천하는 행동이 살아있는 교육이란 걸 실감한다.

김영곤(대구교육정보원 교육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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