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현대미술 운동의 영향이 깊은 탓인지 대구에서는 표현주의의 열정보다 미니멀리즘 경향의 단순성을, 화려한 채색보다 단색조를 선호하는 화풍이 강하다. 어쩌면 번다함보다 과묵한 성정으로 통하는 전통적인 대구 사람의 기질과도 닮았는지 모른다. 세련된 감각을 지녔으되 표현을 절약하고 주제나 내용보다 형식이나 방법 쪽에 더 관심을 두는 작풍은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우세하다.
재료를 탐구하는 모더니스트의 태도는 자신의 표현에 맞는 재료를 개발하는 데서 두각을 나타낸다. 안료에 숯가루를 섞어 한층 깊은 먹빛의 물감을 만들어 쓰는 이태현의 최근 작품들은 기법이나 형식의 추구에 천착하던 이전의 그림에서 이야기를 담으려는 '표현'으로의 변화를 드러낸다.
객관적인 방법의 문제에서 주관적인 내용을 지향하는 쪽으로의 방향 전환은 작업의 방식에 관심을 갖던 모더니즘 예술가에게는 쉽지 않은 도전이다. 형상을 비워내고 추상화했던 화면에 다시 형상을 불러오는 일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표현을 줄이다가 완전한 평면에 이르렀던 그는 개념에 의존하는 대신 직관에 기대어 다시 시각적인 이미지를 찾아 나섰다. 추상표현주의자의 방법은 보편적이면서도 주관적이다. 전형적인 스타일도 개성의 개입으로 주관화된다.
그의 작품을 보고 혹자는 "짙게 드리워진 숲, 어둠 속 고요히 흐르는 바다, 빽빽이 들어선 나무줄기 등 다양한 형상을 보지만 그러나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 구체적인 형상은 아무 데도 없고 캔버스 위에는 검은색이 뭉게뭉게 펼쳐져 있을 뿐"임을 알아차린다. 종래의 그의 작품이 취했던 색면 추상(color field painting)과 올오버(all-over) 페인팅의 전면에 균질적인 화면은 이런 상상을 차단했으나 이번의 작품들은 화면 곳곳에 바탕의 흰 여백을 드러내기도 하고, 붓질의 자국도 다양한 방향과 리듬을 가지고 있어서 마치 흐르는 물이나 바람, 그 속에 서 있는 나무들 같은 형상을 암시하려는 듯하다. 갈필이나 건필로 그린 수묵화에서 발견되는 비백효과와 함께 사의적인 문인화의 인상을 준다. 이 땅의 풍토에 새롭게 정착한 산수화의 모습이랄까. 한문 서체같은 필획을 더하여 더욱 동양적인 정서를 자극한다. 지극한 순수성을 강조했던 모더니즘이 자본주의 체제의 이념적 혼탁에서 벗어나려 했었다면 이제 그 방법이 이 작가에게서는 자연과의 화해로 개인의 교양과 정신의 숭고한 가치를 소통하는 데 사용된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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