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토요갤러리] 아르카디아의 목자

▨ 아르카디아의 목자

작가: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1594∼1665)

제작연대: 1637∼39년

재료: 캔버스 위에 유채

크기: 185×121cm

소재지: 루브르박물관(프랑스 파리)

17세기 유럽미술은 화려하고 역동적인 바로크 일색이라고 할 수 있으나 유일하게 프랑스만이 르네상스 이래의 고전주의 전통을 고수하게 된다. 그 이유로 우선 프랑스인들은 열정적이라기보다는 데카르트의 나라답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추구하는 풍토가 강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유럽 최초의 절대왕정을 이룩한 루이 14세에 의해서 '회화 조각 아카데미'가 설립되면서 국가적 차원에서 고전주의 화풍을 적극적으로 권장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발전한 프랑스 회화는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침착하며 균형이 잡힌 양식으로 전개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17세기 프랑스 회화의 특색이며 소위 프랑스 고전주의의 기초를 이루게 된다.

이 화파의 대표적인 작가 푸생은 프랑스 출신으로 로마에 유학해 당시 유행하던 바로크풍의 그림을 배웠으나 곧 눈을 르네상스 거장으로 돌려 데생은 라파엘로의, 색채는 티치아노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바로크적인 흔적을 지워 나가기 시작한다.

이 그림은 푸생의 후기 즉 고전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조용하고 햇빛으로 가득 찬 풍경을 배경으로 돌로 만든 무덤을 둘러싸고 있는 네 명의 인물이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양치기로 보이는 세 명의 남자 중 한 명이 꿇어 앉아서 묘비에 새겨진 글을 해독하고 있으며, 다른 한 명은 이 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름답고 품위 있는 젊은 부인을 돌아보고 있다.

여자는 맞은편의 목동과 같이 우수에 찬 표정으로 조용히 내려다보고만 있다. 묘비에는 라틴어로 다음과 같이 써놓았다.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ET IN ARCADIA EGO) 이 말은 '나, 즉 죽음은 아르카디아에도 존재한다'라는 것을 뜻한다. 무릉도원과 같은 이상향에도 죽음은 어김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화면은 사각형 구도 및 수직과 수평의 축에 의해 구성되어 기하학적 질서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상적인 비례의 네 인물이 만들고 있는 이야기는 화면의 중심에서 완전히 종결된다. 즉 푸생은 이 그림의 가장자리에 관객의 눈길을 화면 밖으로 이끌 만한 그 어떤 것도 배치하지 않음으로써 뵐플린이 말하는 소위 '닫힌 형식'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한 사물의 색은 그것의 고유색이라고 인정되는 하나의 색만으로 칠해져 있으며 단지 명도(明度) 변화만을 보이고 있는 등 전형적인 고전주의 양식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회화와는 다른 정아함과 간결함이 있으며 그러면서도 인물의 동세나 화면전체의 명암 및 구름의 표현 등에는 어쩔 수 없는 17세기 초의 바로크 화풍이 남아있어 그 역시 이 시대 화가임을 말해주고 있다. 권기준(대구사이버대 미술치료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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