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드라마 '수사반장' 이후 40년 연출인생…연출가 표재순

국민드라마 '수사반장'에 나온 첫 범인은? 정답 임현식, 수사반장에 최다 등장한 범인은? 정답 이계인.

전 국민적으로 각광받은 드라마 수사반장의 공동 프로듀서를 맡은 연출가 표재순(72)씨가 드라마 수사반장에 대해 묻자 기자에게 도리어 퀴즈를 냈다.

표씨는 동양TV에서 MBC로 옮긴 다음해 드라마 수사반장에 첫 발을 디뎌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는데 주역이 됐다. '수사반장'은 1971년 3월 6일 첫방송을 시작해 1989년 10월 12일 막을 내리기까지 18년간 880회를 방송한 장수 드라마이자, 당시 최고의 인기드라마. 표씨는 시작부터 끝까지 참여했다. 지금도 한국의 콜롬보 최불암(박 반장)과 조경환·김상순·임현식·이계인 등 당시 출연진들과 1년에 1, 2번씩 만나 회포를 푼다.

그는 "당시 최불암씨가 연기했던 박 반장의 모델이 70년대 서울시경찰국 형사과장을 했던 최중락 전 총경인데, 지금은 경비업체 에스원 고문으로 있다"며 "수사반장에 열연한 배우들이 국민적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그 뒤에 스태프들의 엄청난 고생이 있었다"고 말했다. 또 "힘들었지만 호흡도 잘 맞았고, 정말 재미있었다"고 덧붙였다.

표씨에게 이 추억의 국민드라마는 대중에게 다가선 첫 단추였을 뿐 이후 아시안게임, 올림픽 개막식·폐막식, 월드컵 전야제 총연출가로 우뚝 섰다. 주요 국가행사 전문 총연출가로 자리잡았다. 경주 EXPO, 하이 서울 페스티벌 등도 총감독을 맡았다.

그는 88올림픽 총연출 당시 재미있는 일화도 들려줬다. 올림픽 개막식을 앞두고 너무 긴장한 탓에 밤잠을 설치고 때론 악몽에 시달렸다. 하루는 꿈을 꿨는데 개막 당일 올림픽 개막식이 오전 9시30분인데 잠에서 깨어보니 12시였다는 것. 세상이 하얗게 변했고 털썩 주저앉았는데, 뒤늦게 '아! 꿈이구나'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개막을 앞두고 몇 달 동안 하루에 2, 3시간밖에 못 자서 그랬지만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몰랐다"고 털어놨다.

표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상당한 순발력과 재치가 느껴졌다. 권위나 가식도 없었다. 단답형으로 편하게 대답했고, 어떤 질문에는 두세 마디로 끝냈다. 간결했다. 한 길만을 걸어온 그의 삶에서 묻어나온 인상이었다.

현재 연극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安重根)'의 연출을 맡고 있는 그를 4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만났다.

◆젊은 시절과 대구와의 인연

1937년 해가 넘어가기 이틀 전인 12월 30일 서울 시골집에 태어난 장난꾸러기 아이.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두들겨 맞으며 자란 개구쟁이였고 가난 속에서도 희망만은 품고 자랐다.

일제 시대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대구에서 피난생활을 했다. 그는 2년 동안 속칭 '양키부대 하우스보이'를 하면서 용돈을 벌어 썼다고 했다. 미군 잔심부름꾼이었다. 미군 대구기지와 동촌비행장 등을 오가면서 힘든 피란생활을 했다.

피란생활을 끝내고 다시 서울로 간 그는 배재학당(고등학교)을 졸업한 뒤 연세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선 연희 극예술연구회에 들어가 동아리 활동에 전력했다. 연기자가 되고 싶었고 또 실제 주인공을 맡아 연기를 하기도 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그는 "키도 땅딸막하고 코도 빈대코인 내가 연기하기는 힘들었다. 최무룡이나 신성일 같이 키도 크고 잘 생겨야지"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연출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대학 졸업 후 방황도 했다. 결혼하고 돈을 한 번 벌어보겠다며 서울 중앙시장에서 7년 동안이나 식품장사를 했다. 하지만 장사는 체질이 아니었던지 큰 성과를 내지 못한 채 TV연출 쪽으로 진출하게 됐다. 1967년 동양TV의 프로듀서로 입사했다. 1969년 MBC가 개국한 다음해 MBC 프로듀서로 자리를 옮겨 대연출가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표씨는 감투 복도 많았다. 국가 주요행사의 단골 총연출가로서 자리를 굳혔을 뿐 아니라 SBS 프로덕션 대표이사, 제1대 세종문화회관 이사장,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경기도 문화의전당 사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또 자신이 설립한 JS시어터 대표이사이기도 하다.

◆연출가로 살아온 반세기 '겸손'

표씨는 유명해진 이후에도 전면에 나서길 원치 않았다. "수줍음이 많고 숫기가 없어서 말을 잘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인터뷰는 대체로 거절하며 산다. 본지와의 인터뷰는 동료인 도동환 민족문화영상협회 회장의 권유와 매일신문의 정신적 지주인 최석채 선생을 생각해 응했다고 했다.

그는 "제가 좋아 하는 일이고 평생 이렇게 살아왔는데 뭘 내세우겠느냐. 연출이지만 스태프라고 생각하며 항상 무대 뒤에서 열심히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의 겸손함과 달리 무대 안팎에서 연기자들과 배우 등 많은 이들이 그에게 존경심을 갖고 있다고 한 스태프가 귀띔했다. 극장 주변을 돌 때 탤런트 최수종, 정혜선 등이 그에게 인사를 하고, 정다운 얘기를 주고 받았다.

그는 올해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이 주최한 '방송인 명예의 전당'(제작부문)에 헌액됐다. 2002년에는 연세언론인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는 좀처럼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짧은 질문 VS 짧은 대답

-건강비결은.

"그냥 웃고 지내는 거지요. 가슴에 담아두는 일은 잘 없고 빨리 털어요"

-하루 몇 시간씩 자나요.

"5시간 이상 자지 않아요. 2, 3시간 자는 날도 허다해요. 그럴 땐 토막잠을 자죠"

-나이가 많은데 따른 부담이 없나요.

"나이아가라 아세요. 폭포가 아니고 '나이야 가라'(웃음)"

-'대한국인 안중근'은 어떻게 연출을 맡았나요.

"이 연극은 부산저축은행그룹의 메세나(기업의 문화활동 지원)로 제작됐는데, 올해 의거 100주년을 맞아 인간 안중근을 재조명한 내용입니다."

-반세기 연출동안 연기 잘하는 배우를 꼽으면.

"안중근역을 맡은 최수종씨가 10년 만에 연극 무대에 오르는데 성실하게 잘 해줘서 고맙습니다. 추상미씨의 아버지인 추송웅씨는 천상 연기자입니다. 그는 죽을 때도 영정사진이 우스꽝스런 연기자였습니다. 이번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탤런트 이순재 씨도 연기를 곧잘 하지요. 후배들 중에도 있는데 질투심 유발할까봐 말 안하겠습니다."

-요즘 대중문화에 대해 한마디 한다면.

"깊이가 없어지고 비인간적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선 세계적 흐름 같아요. 탓할 일도 없죠."

-강연활동도 합니까.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서 지난해 봄까지 강의를 했고, 지금은 배재대에서만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이젠 특강 형태로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존경하는 감독이 있다면.

"국내 이만희, 신상옥 감독같이 카리스마 넘치는 스타일을 좋아합니다."

-기억에 남는 작품을 든다면.

"(표씨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옆에 인사 온 김의경 공연문화산업연구소 이사장이 대신 답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입니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사진·프리랜서 장기훈 zkhaniel@hotmail.com

※표재순은? 1937년 서울 출생. 배재고, 연세대 사학과 졸업. 연희극예술연구회 동아리 활동. 1967년 동양방송 TV제작국 드라마 프로듀서, 1970~1989년 MBC 프로듀서, MBC TV제작국장, 제작이사, 1994~1998년 SBS 프로덕션 대표이사 사장 역임. 1999~2002년 제1대 세종문화회관 이사장. 경력 '수사반장' 드라마 프로듀서, 88올림픽 개·폐막식 총연출, 월드컵 전야제 총연출, 경주 EXPO, 하이서울페스티벌 총감독 등. 2002 연세 언론인상, 2009 방송인 명예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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