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저우언라이

김상문 지음/아름다운 사람들 펴냄

1976년 1월 8일, 중국 공산당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사망했다. 이날 뉴욕의 유엔본부 문 앞에 조기가 게양됐다. 국가원수의 죽음에 유엔이 조기를 내건 것은 이례적이었다. 1945년 유엔이 성립된 이래 많은 나라의 원수들이 죽었지만 유엔본부가 조기를 게양한 적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동서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 유엔이 중국 공산주의자를 위해 조기를 걸었다는 사실에 외교관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쿠르트 발트하임은 유엔본부 앞 계단에 서서 짧은 연설로 조기를 게양한 이유를 밝혔다.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기 위한 유엔의 조기 게양은 제가 내린 결정입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중국은 문명고국으로 금은재화가 부지기수이고 인민폐도 헤아릴 수 없게 많습니다. 그러나 저우언라이 총리는 생전에 한 푼의 저축도 없었습니다.(실제로는 5천위안의 유산이 있었지만 이것이 '남긴 재산이 없었다'는 말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는다. 그는 27년 동안 중국을 이끌어온 총리였지만 땅 한 평도 없었다.) 둘째, 중국의 10억 인구는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우언라이 총리에게는 한 명의 자식도 없었습니다. 만약 어느 나라 원수든 앞으로 이 두 가지 중 한 가지에만 부합되어도 그가 서거하는 날 우리 유엔에서는 그를 위해 반드시 조기를 게양할 것입니다."

당시 광장에 모여 있던 각국의 외교관들은 말문이 막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이지만 존경할 수밖에 없었던 저우언라이를 위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물론 저우언라이가 일부러 자식을 낳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한창 활동해야 할 시기에 아이가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부인이 탕약을 먹고 낙태를 시도하는 바람에 첫아이를 잃었다. 이후 또 임신했지만 출산일을 넘겼고 강제 출산하는 과정에서 사산했다. 그러나 저우언라이 부부는 혁명 과정에서 희생된 열사들의 자녀 10명을 양자로 입양, 성인이 될 때까지 보호하고 키웠다.)

저우언라이는 평생 청렴과 근면, 정직을 바탕으로 살았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던 상황에서도 저우언라이는 그런 태도를 견지했다. 국민당의 공격으로 궁지에 몰려 도망다니던 시절에도 농가의 음식을 얻어먹을 때는 반드시 돈을 지불했다. 심지어 집 주인이 없는 상황에서는 음식 값과 양해를 구하는 편지를 써놓고 음식을 가져갔다. 사진이나 TV, 혹은 영화에서 저우언라이는 몸에 딱 맞는 회색 중산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등장한다. 이것은 미화된 모습일 뿐이다. 평소 저우언라이가 입었던 옷은 말쑥하기는커녕 기운 자국이 옷의 3분의 1을 넘었다. 당시 총리의 옷을 직접 수선했던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수십 년 동안 총리님께서는 새 옷을 몇 벌 맞추기도 했습니다. 하도 가끔 맞추는 것이라 저는 그것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총리의 옷을 기워드린 것이 몇 번이나 되는지는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저우언라이가 썼던 욕실 타월은 20년 남짓 사용해 앞뒤로 열네 군데나 기웠다. 병원에 입원할 때 저우언라이는 그것을 베개로 삼을 정도로 버리기 아까워했다. 얼굴을 닦던 타월이 다 해지자 목욕 수건으로 썼고, 그 뒤로는 발을 닦는 데 썼다.

저우언라이는 죽기 전에 587일간 병원에 입원해 있었으며 14번의 크고 작은 수술을 받았다. 그 와중에도 그의 머리맡에는 늘 서류 더미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587일 동안 그는 220명을 만났으며, 32번의 회의를 진행했고, 외국 손님을 65차례 접견했다. 외부 손님과 면담이 가장 길었을 때는 4시간 20분이었고, 가장 짧았을 때는 15분이었다. 그는 병실에서도 불철주야 일했다. 그는 임종을 눈앞에 두고 당부했다.

"(내 장례식에) 친척들은 절대 베이징에 오지 못하도록 하라. 만약 오고자 한다면 단돈 1원도 정부에서 지원받지 말고 본인 부담으로 와야 한다."

죽어서뿐만 아니라 총리직을 수행할 때도 집으로 오는 손님을 모두 자신의 월급으로 대접했다. 나라의 돈은 한 푼도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그는 '봉급이 다 떨어져' 손님 대접을 소홀히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국 국민들이 저우언라이를 존경하는 것은 그의 근검절약과 성실 때문만은 아니다. 마오쩌뚱이 중국 지도자로서 용장이라면 저우언라이는 덕장이었다. 그는 인민을 위해 자신보다 연하이자 당 서열이 낮았던 마오쩌뚱을 1인자로 밀어올리며 2인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저우언라이는 자신의 명예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위해 용장 마오쩌뚱을 탄생시키고 마오쩌뚱의 불 같은 성격을 인민과 소통하도록 도왔으며 그 오류와 책임까지 떠안았다. 당시 적대국이었던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이렇게 평가했다.

"마오쩌뚱이 없었다면 중국의 혁명은 결코 불붙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우언라이가 없었다면 그 불은 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몇 차례 수술을 받은 후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음을 안 저우언라이는 덩샤오핑을 총리로 천거했다. 덩샤오핑의 인물됨과 능력을 보았고, 그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중국을 건설하는 데 덩샤오핑의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뚱과 덩샤오핑의 인물됨과 능력을 알아보고 국가를 위해 기꺼이 그들을 1인자의 자리에 앉혔던 것이다.(정치 권력을 타인에게 양보하고 스스로 물러나 2인자의 역할을 수행하기는 무척 어렵다.)

이 책의 지은이 김상문은 "저우언라이가 진정으로 충성을 바친 대상은 마오쩌뚱이 아니라 인민과 국가였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존경할 수 있는 지도자가 부족한 것은 고사하고 대부분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도덕과 품성에서 심각한 결함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이 책의 추천글을 쓴 사람들은 "한국의 위정자들은 걸핏하면 국민을 위한다고 말하지만, 진정 무엇이 국민을 위하는 것인지 돌이켜보기를 바란다.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 국가를 위하는 것인지 느끼고 행동하기를 바란다"고 밝히고 있다. 299쪽, 1만5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